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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강자적 삶의 방식으로 가는 길

by 홍차영차 2021. 6. 10.

강자적 삶의 방식으로 가는 길 - 문화에 대항하는 투쟁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1장

 

 

얼마나 오래전부터 나는 내 자신에게서 생성의 완벽한 무죄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며 나는 이미 얼마나 많은 특이한 길들을 지나왔던가! 처음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것이 내게는 올바른 해결책처럼 보였다. “일종의 예술작품과 같은 것으로서의 실존은 전혀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 자체가 현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죄의식의 모든 개념에는 객곽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모든 삶이란 필연적으로 부당하고 비논리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번째에 나는 모든 인과관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목적을 부정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그것은 내게는 어떤 책임도 없다는 감정을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모든 찬사와 비난의 밖에 나를 위치시켜, 과거와도 현재와도 무관하게 내 방식대로 내 목적을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니체와 악순환> 35쪽,  [전집] 18권 362쪽 재인용)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형성된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 현재의 주체가 ‘자기인식(오로지 이성과 말(낱말)에 예속되어 있는 인식)’이라는 개념에 예속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출발해 로마시대까지 1000년에 걸친 시대를 주체형성이라는 측면으로 분석했고, 지금 형성되는 거의 모든 주체생산방식은 오로지 ‘법(이성)’에 예속된 주체, 한 가지 방식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푸코는 1000년의 기간들을 분석하면서 철학이란 철학들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생활양식이었고, 삶의 방식에 대한 실존적 선택임을 새롭게 발견해냈다. 그러면서 푸코는 자신의 삶을 공장에서 쏟아져 생산되는 동일성을 가진 ‘공산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유일하고 독특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가길 원했고, 삶 자체를 ‘한번도 되어보지 못한 자기가 되어가는 실험’으로 제시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니체와 악순환>의 문이 열린 기분이다. (아직 그냥 문만 열렸다. -.-;) 푸코의 해석은 “일종의 예술작품과 같은 것으로서의 실존은 전혀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 자체가 현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에 대한 20세기 주석처럼 읽힌다.

철학자가 학자나 고양된 (종교적) 인간으로 오해되서는 안 되고, “충동이 마침내 한 번 말하도록 하는 일종의 계기이자 기회”인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진리라고 추종되는 거의 모든 것들은 “확고한 충동”을 가진 철학자의 일관된 체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자신의 충동을 세상으로 드러낸 것이고, 강력한 충동은 하나의 고유한 척도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척도는 선과 악에 대한 취향, 즉 도덕으로 불린다. 거칠 것 없는 충동은 주인이 되고자 하며 모든 사물과 사건,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도덕은 취향이었고, 결정적 한 번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했다.

철학자의 사유와 체험이 자신이 태어난 사회를 보증하는 것이라면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니체는 기존의 사회를 보증하는, 즉 현재의 주체 생산 방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전복적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다. 현재의 관습, 지식, 사유, 풍습, 습관들은 모두 문화의 생산물이기 때문이고, 문화란 다수의 동의를 요청하는 ‘약자들’의 생활 방식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에게 모든 도덕은 사유와 학문을 더럽히는 ‘형이상학적 병균’이 되고, 타도해야할 가장 커대란 적이다. 그 괴물은 바깥에만 있지 않고 각자의 내부에도 도사리고 있다.

 

니체는 ‘강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선악의 기준이 아니라 “무엇이 병들었고 무엇이 건강한가? 무엇이 무리적인고 무엇이 특이적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제시한다. 현재의 개인이 마주치는 모든 관습, 지식, 풍습, 습관이 노예제도로부터 생겨난 열매이기때문에 니체는 그것들에 투쟁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 역시 개인 안에 현전하는 힘들의 투쟁들이고, 강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실험이 중요하다. 그 힘들을 주인으로 혹은 노예로 만드는 것은 매번 힘들이 경합하는 우연의 실험장소인 ‘신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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