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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역사의 모든 이름과 영원회귀

by 홍차영차 2021. 6. 15.

역사의 모든 이름과 영원회귀

: <니체와 악순환> 3장, 5장

 

 

강조돼야 하는 것은 주어진 동일성의 상실이다. ‘신의 죽음’(책임 있는 자아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신의 죽음)은 영혼에게 니체의 영혼의 다양한 기분들 안에서 이미 감지된 모든 가능한 동일성들을 연다. 영원회귀의 계시는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한 동일성들을 차례차례로 현실화 한다. “역사의 모든 이름들, 결국 그것은 나다.” (<니체와 악순환> 86쪽)

 

 

‘영원회귀’ 하면 떠오르는 것은 “네가 지금 살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로 시작하는 <즐거운 학문> 341절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여기에서 나는 주사위 놀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지금 이 놀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가능성, 되어진 것, 되어갈 것, 그리고 지금까지를 모두 긍정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했다. 그런데 피에르 클로소프스키는 영원회귀를 조금 더 깊숙히 들여다 보려고 한다. 니체의 사유와 저작을 통해서 영원회귀를 환상적으로 설명한다.

 

영원회귀가 ‘동일성의 상실’이라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결정적 한번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성이란 사실 '결정적 한번으로 채택된 관습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장치인 도덕'에 예속된 삶의 이름일뿐이다. 거꾸로 우리는 이런 도덕에 맞서는 자신을 구성해야 한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의식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충동을 억압하고 의식이 만들어낸 온갖 허상들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동일성은 한낱 날조다. 우리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결정적 한번이 아닌 끊임없는 파괴와 해체가 지속되는 과정일 뿐이다. 동일성이라고 상상하는 것 토대에는 충동들, 강도들의 파동들이 있다.

영원회귀는 동일성이라는 허상을 파괴/해체하고, 스스로를 강도들의 파동으로 볼 수 있는 공포스러우면서도 고양되는 사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떻게 영원회귀가 어떻게 반복과 “역사의 모든 이름”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는 개인 이상의 존재이다. 게다가 사슬 전체이며, 사슬의 모든 미래들을 과업으로 책임지고 있다.”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자. 니체는 <우상의 황혼> ‘네 가지 오류’편에서 누구도 자신이 자기임을 증명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 것은, 즉 나를 나로 만든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이전에 경험했던 모든 경험들과 주위에 있던 환경들(사물, 사람, 환경) 모두의 결과이다. 즉 현재의 나를 바꾸려는 시도는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 전체 “사슬 전체”를 바꾸려는 시도이고, 이는 우주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영원회귀로 돌아가보자. 영원회귀의 사유가 돌연히 임했다는 것, 영원회귀의 체험을 긍정한다는 것은, 자기를 구성했던 모든 충동들, 그리고 그 충동들이 구성했던 것, 구성할 것, 그리고 구성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일이 된다. 영원회귀의 삶이란 정말로 “역사의 모든 이름들”이 자신임을 체험하는 삶이고, 삶의 모든 이름과 가능성을 긍정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영원회귀는 ‘있는-그대로-존재하기’의 필요조건으로 ‘선재’를 선언한다. 나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고, 묻히고, 사라지지만, 나의 강도들, 충동들은 언제가 앞서 있었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세계에 도래한 모든 것, 도래하는 모든 것, 언젠가 도래할 모든 것’에 적용되는 하나의 기호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만이 우리의 가르침이 될 수 있는가? - 인간 각자에게 그의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신도 사회도 부모도 조상도 각 개인 자신도 그의 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거부되는 터무니없는 표상은 칸트가 그리고 그 전에 이미 플라톤이 가르쳤던 ‘예지적 자유’라는 표상이다.) 하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환경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각 개인의 숙명적인 본성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나 어떤 의지 혹은 어떤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맞추려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목적’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것은 우리 자신이다. 목적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 각 개인은 필연적인 존재이며 하나의 숙명이다. 그는 전체에 속해 있으며 전체 안에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를 심판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체를 심판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전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 존재의 방식이 제일 원인으로 소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세계가 감각중추로서의 혹은 정신으로서의 통일체는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해방이다. 이와 함께 비로소 생성의 무구함이 회복된다. … ‘신’ 개념은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 우리는 신을 부정한다. 그리고 신을 부정함으로써 책임을 부정한다. 이와 함께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한다.
(<우상의 황혼>, 네 가지 커다란 오류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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