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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니체의 개체론 - 사물은 그 영향의 총합이다

by 홍차영차 2021. 5. 12.

사물이란 그 영향의 총합이다 - 니체의 개체론

: <니체 문학으로서 삶> 3장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끊임없이 강조한 니체가 “물 자체”라는 개념을 비판한 것은 아주 당연하다. 니체에게 물 자체란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 미치는 영향의 총합을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사물은 그것이 처한 다양한 상호관계로부터 독립되어 떨어져 나올 수 없다. 모든 대상은 다른 대상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본질을 가진 사물들, 이것은 독단주의적 관념이다.” 146쪽
 … 사물의 성질이란 다른 ‘사물’에 미치는 영향이다. 만약 다른 ‘사물’을 제거한다면 그 사물은 아무런 성질도 갖지 못하게 된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특정한 이해와 필요성, 가치관, 권력의지를 반영하는 특정한 관점에 따라서 그것의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 147쪽, <힘의지> 557 재인용)

 

스피노자의 복합개체론과 니체의 힘의지

스피노자와 니체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보존하거나 지배하려는 어떤 방식도 긍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풀어내는 개체론을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이란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개체론은 항상 타자를 포함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개체는 복합개체이다. 어떤 개체든지 자신보다 더 작은 부분을 갖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한 더 큰 개체 속의 부분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부분으로 심장, 폐, 간을 갖고, 심장은 더 작은 부분들로 구성된다. 인간보다 큰 개체로 가족이 있고, 이보다 더 큰 개체로 마을이 있다. 아주 미소한 세포 하나 속에도 무수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커다란 공동체로 보이는 국가 역시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향들의 총합이 사물”이라는 말은 니체식으로 표현되 개체론처럼 보인다. 니체 자신의 언어로 말해보자면, 어떤 힘(의지)도 부분으로 이루어진 의지들의 경쟁(agon)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 힘의지들 사이의 경쟁으로 이루어진 더 큰 힘의지가 있다는 말. 그런데 니체의 개체론은 우리가 ‘자아’라고 말하는 것들을 좀 더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스피노자가 공동체의 관점에서 복합개체론을 전개한다면, 니체는 개인의 관점에서 개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와 아서 단토가 언급했듯이 개인, 개체, 복합개체라는 말들은 오해의 소지를 갖고 있다. 니체는 분명 어떤 개체도 그것 자체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물들의 영향으로 해석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본질, 물 자체를 가정하는 개인들 해체하기 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물 자체와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체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가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그는 이 도구들과 함께 스스로 몰락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니체가 마지막 시기에 힘의지에 주목하면서 자아, 개인, 물 자체의 해체에 공을 들이고, 망치를 들고 수천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해온 ‘모든 가치들의 전도’를 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자신 이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개인이나 물 자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잉여와 배치

스피노자와 니체 모두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되지 않음을 주장했다. (둘 다 ‘정신의 발견’ 이후에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니체는 힘의지라는 개념, 이해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을 통해서 개인의 해체를 극한까지 몰아갔다. 니체는 개인과 타자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신에게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개체의 특징을 자신을 둘러싼 타자들의 영향으로 생산된 것으로 말한다.

 

한 사물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특징들의 전체 조합에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부분이 없다면 전체의 성격이 완전히 변한다. 그렇다면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단 하나의 전체만을 말하는 셈이다. 이 전체는 서로 독립적으로 보이는 두 종류의 특징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159쪽

 

니체는 이성의 세계, 객관성의 세계, 언어화 될 수 있는 세계, 수치화가 가능한 세계로 변화하면서 배제된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니체가 보기에 개체의 핵심은 본질이라고 보이는 특징들이 아니라 그 특징들을 둘러싼 ‘잉여들’에 있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보이는 휴지, 소수점 이하의 숫자들, 아무런 먹을 것도 주지 못하는 잡초와 벌레들. 고등학교에서 단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수많은 친구들, 길을 걸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타자, 한 번도 들어갈 일 없는 무수한 빌딩과 지금 이후로 절대 볼 수 없는 흘러가는 물과 바람! 지금 내가 보여주는 특징들, 내가 나임을 드러내는 독특성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소한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다. 우주에 아무것도 없다면,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내가 나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모든 것들이 바로 나를 통해 하나의 법칙,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내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으로 성급히 내달리면 안 된다. 니체는 개체의 부분이 전체의 일부로서 1/n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1/n은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는 결국 하나다. 우리는 언제나 “단 하나의 전체”만을 말하는 셈이다.

 

세계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예술작품이다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보자는 것은 ‘존재는 생성과 변화’라는 니체의 관점을 적확하게 관통하는 것 같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지금까지의 설명을 버리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새로운 대사와 사건으로 지금까지의 관점이 바뀌는 것을 즐겁게 생각한다. <유주얼 서스펙트>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 스페이시가 절뚝 절뚝거리며 걷다가 똑바로 걷는 모습에 소름을 느끼지만, 그 한 장면으로 우리는 이전에 2시간동안 몰입해서 본 영화 전체를 거꾸로 다시 보는 즐거움을 선사받는다. 우리의 삶과 세계도 이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의 매 순간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배치와 사건만으로 이전에는 절대로 다른 의미를 줄 수 없을 것 같던 과거(사건)가 다르게 변할 수 있다. 운명을 즐기라는 ‘아모르 파티’란 바로 이런 창조적 삶을 살아가라는 응원가로 들린다.

 

세계와 대상, 사람들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텍스트와 그것의 구성 요소라는 모델에 입각해 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문학적 해설의 모델에 기초해 있다. 니체의 모델은 놀랍고 역설적인데 “세계는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는 예술작품이다”라는 말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작품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우리에게 독서(읽기)와 해석, “훌륭한 문헌학”을 요구한다. … 세계의 자기 창조라는 관념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책의 독자도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163쪽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도 사건을 재해석하는 일은 많은 결과를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일이다. 독서(읽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텍스트”는 다시 씌어진다. … 언젠가 미래에 종결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 텍스트는 미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각 부분들을 상호 조정하는 작업은 끝이 없는 진행형이 된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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