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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악순환과 영원회귀

by 홍차영차 2021. 6. 10.

악순환과 영원회귀 - 신체의 관점에서 망각과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자아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2장

 

 

피에르 클로소프스키(1905~2001)

 

내가 얼마나 충실하게 사유부재의 프로그램을 철저히 수행했는지를 자네는 상상할 수 없을 걸세. 내게는 그것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 있네. 왜냐하면 ‘사유의 이면에는’ 두려운 고통의 발작이라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네. 생-모리츠로부터 자네에게 보낸 초고는 아주 비싸게, 고통스럽게 대가를 지불하고 쓴 것이라서, 만약 피할 수 있다면 이런 대가를 지불하고 쓰려는 사람은 아마 누구도 없을 걸세. 이제 그것을 다시 읽는 것은 너무나 긴 단락과 괴로웠던 기억 때문에 나에게 종종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네. … 이걸 정서할 때마다 나는 매번 욕지기를 느꼈다네. … 쓰기를 마친 후에 사유들의 연관성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네. 사실 내게는 자네가 말하는 ‘두뇌의 에너지’를 몇 분, 몇 십 분 동안 사용해 고통스러워하는 두뇌로부터 그 사유를 뽕아내는 것이 필요하지.하지만 때때로 내가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니체와 악순환> 41쪽,  가스트에게 보낸 편지 - 1879년 10월 5일 재인용)

 

“니체는 1877년부터 1881년까지의 기간 동안 발작 후에 매번 행복감에 빠졌다. 그것은 그의 신체의 동요를 관통하며 발언된 힘들을 탐구하도록 그를 조금씩 유혹했다.” 니체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통을 관찰하면서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신체가 “가장 직접적인 힘들”과 “가장 멀리 있는 힘들과 관련된다면, 신체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기쁨/슬픔. 쾌/불쾌) “우리의 운명에 대해 가장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니체는 자신에게 발생하는 두통이 단순히 외부에서 오는 공격이 아님을 발견했다. 고통의 뿌리는 그의 신체 안에 있었다. 주기적 발적으로 나타났던 격렬한 두통은 신체적 (정신적) 자아가 해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공격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유는 불가능해진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의식이란 신체를 통해 전달되는 충동의 암호들이다. 즉 의식은 이러한 암호들로 구성되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의식은 매번 다시 신체에서 발생하는 암호를 해독하는 데에 실패한다. 의식은 신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을 뒤집고, 왜곡하고 여과하는 기호들의 코드를 만들어낼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니체는 신체적, 정신적 힘들의 해체를 향한 경합을 관찰하면서 오직 신체적 기준에만 복종하는 하나의 지성을 발견한다. 신체는 충동들, 힘들의 경합 장소일 뿐이므로, 이제 신체는 우연의 산물로 나타난다. 그 충동들은 신체라는 장소를 통해 한 인간의 삶을 위해 개인화되었으므로, 다시 탈개인화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신체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고유한 신체라는 것은 일시적 화해 모드에 있는 충돌들의 우연한 마주침이고 배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우연의 산물인 신체는, 매번 죽음과 재생의 과정 속에서 죽고 되살아난다. 이렇게 죽고 되살아나는 신체를 연결시키는 것은 충동의 운동이다. 이 충동은 그 순간의 경향성이고, 힘에의 의지이다.

신체가 충동들의 산물이라면, 자아의 일관성 역시 우연한 것이 된다. 새로운 충동들 - 힘에의 의지는 그 신체의 새로운 조건을 탐구하게 된다. 니체는 여기에서 우리의 의식과 지성보다 더 넓은 하나의 지성을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것은 바로 카오스다.

이제 인간은 하나의 기호로 나타난다. 몸짓 운동들의 기호이자 힘에의 의지!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자아의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경향성으로 본다. 이렇게 니체는 인간을 정신의 측면이 아니라 신체의 관점에서 처음 사유한 철학자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충동, 힘에의 의지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의미가 있을까? 여기에는 의미도, 의지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 무한히 반복되는 허무를 향한 과정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언어를 포기할 수 없고, 의도와 의지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의지와 의도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악순환의 법칙’에 지배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의지와 지성 너머의 커다란 지성으로 나타나는 카오스! 그것은 망각과 무의식의 장소, 힘들의 발생지인 다수를 발생시키는 장소이다. 여기서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일 수 있다는 토대를 마련한다. 삶에 필요한 망각과 무의식!

여기서 영원회귀는 악순환이 된다. 즉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였었고, 이제부터 우리가 되어 갈 것, 단지 무수히 많은 횟수일 뿐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 현재 우리의 모습과 다른 것의 망각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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