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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세상은 낱말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by 홍차영차 2021. 4. 28.

세상은 단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 <바그너의 경우>

 

 

 

니체(1844~1900), 바그너(1813~1883)

 

니체의 텍스트 중에 바그너를 제외하고 다른 철학자의 이름이 사용된 적은 없다. 니체가 1888년 <바그너의 경우>, 1889년 <니체 대 바그너>를 썼다는 것은 니체에게 바그너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왜 바그너일까? 니체가 생각하는 음악에서 시작해야 한다. 니체는 음악이야말로 삶의 표현이고, 삶 그 자체이며, 힘에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반이성과 비논리의 논리를 말했던 니체에게 자신의 철학은 한 마디로 음악이어야 했다. 니체는 이런 음악을 삶에 가장 잘 적용했던 것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니체의 첫 저작이 <비극의 탄생>임을 생각해보면 니체 철학에서 ‘그리스 비극’이 갖는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단검처럼 날카롭게 피를 내뿜으며
피이슬의 검은 소나기로 나를 쳤소. 그래서 나는
이삭이 팰 무렵 제우스의 풍성한 비의 축복을 받아
기뻐하는 곡식 못지 않게 기뻤소. …
나는 이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오. 그리고 시신에
제주를 뭇는 것이 격식에 맞는다면, 이러한 내 행동은 
정당하다 할 것이오. 정당하고 말고요. 이 사람은
집 안에 그토록 많은 저주스런 악으로 잔을 채워놓고는
이제 귀국하여 스스로 그잔을 비우고 있으니 말이오. <아가멤논> 1389행 이하

 

니체에게 그리스 비극 = 음악이다. 일반적으로 비극의 핵심 요소로 음악과 대화를 꼽는데, 니체는 여기서 대화보다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니체게 보기에 가장 비극적인 작품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으로 유명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들이다. 특히 <아가멤논>은 강렬하고 거칠고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며 감각적이고 음악적이다. 니체말로 표현하지만 여기 저기서 ‘힘에의 의지’들의 충돌이 넘처난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단칼에 죽이고, 그를 죽이면서 내뿜어진 피를 풍성한 봄비에 비유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대사를 보라. 대담하면서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으면 자신의 잔인성에 대한 인식도 없다.

하지만 아이스퀼로스 이후 그리스 비극은 쇠퇴를 겪는다. 소포클레스는 음악과 대화 사이에 균형을 취하면서 아테나이 및 그리스 전체에서 숭배받았지만, 그리스 비극은 점차 음악에서 대화(언어)로 그 중심 궤도가 바뀌고 있었다. 마지막 비극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시대에 음악은 점점 더 보조적인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의 작품은 점점 더 논리적인 대화들로 채워진다. 에우리피데스가 당시 미학적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비극이 어떤 모습으로 채워졌을지 상상해 볼 수 있다.

 

니체가 보기에 세상은 단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상호 소통을 하기 위해서 단어들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점 더 글자, 단어, 개념들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진짜 세상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수박이라는 것은 푸른색 바탕에 검은 색 줄무뉘를 갖고 있고 겉은 빨갛 속을 갖고 있는 과일이 아니다. 여름철 한 잎 베어물었을 때 느껴지는 그것이 바로 수박입니다. ‘사과’, ‘커피’, ‘세월호’, ‘피’라는 말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힘에의 의지’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대화를 나누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니체는 이렇게 사라져버린 비극의 부활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보았다. 바그너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오페라라고 부르지 않고, 음악극Musikdrama라고 불렀다. 바그너 이전 오페라에서 음악은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중간 중간에 아름다운 아리아가 나오지만, 중심 줄거리는 래치타티보recitativo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음악을 대사와 대등하게 사용했고, 음악 자체를 통해서 분위기와 그 인물을 표현할 수 있게 라이트모티브leitmotif를 확립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 수퍼맨 메인 테마를 듣는 즉시 수퍼맨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바그너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학적 재능과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갖추면서 현대적인(?) 음악을 생산해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니체는 미래 철학을 보았고, ‘그리스 비극의 부활’을 떠올렸다. 다른 한 가지로, 오페라에서 바그너는 음악에 끊어지지 않게 만들었고, 상영 시간 내내 음악이 계속 나오면서(무한선율) 줄거리가 아닌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실험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876년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의 첫째날을 회고하면서 니체는 그의 음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그 음악은 니체가 생각했던 음악이 아니었다. 음악적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들의 배경들을 잘 이해해야했고, 전체적인 줄거리도 머리가 아플정도로 복잡해졌다. 그의 음악은 이제 음악이 아니라 신화가 되려고 했고,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는 구원자로 나타났고, 그렇게 행세했다. 이념이 되어가는 음악, 새로운 종교 역할을 떠맡으려고 하는 바그너의 음악은 니체가 그토록 혐오했던 독단주의적 모습을 갖춰갔다. 그의 음악에 가벼움, 명랑함은 없어졌고, 내용조차도 구약성서가 아니라 신약성서의 금욕주의적이면서 무겁고 진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니체는 바그너를 데카당스의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데카당스는 기본적으로 쇠퇴, 퇴화, 썩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19세기 데카당스라는 것은 기존의 가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존재를 말했다. 바그너는 두 가지 의미에서 데카당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때까지의 음악적 어법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음악적 형태와 표현(라이트모티브, 무한선율)을 부여했다. 하지만 또한 바그너는 비극의 부활이 아닌 그리스 비극의 부패한 모습으로 전락했다.  스스로가 구원자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내용이나 형식면에서도 음악을 도구로서 사용하면서 종교적인, 이념적인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언어의 능력이 극대화된 바그너의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바그너가 현대성을 요약하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가 분명 현대적인modern 음악의 형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음악가로서가 아니라 배우로, 즉 배우를 바라보는 대중들을 유혹하기 위한 방식으로 음악을 도구화했기 때문인것 같다.

분명 처음 음악극을 포방했던 바그너는 강자적 모습을 보였다. 주변을 의식하기 보다 자신의 의지로 대담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점점 더 큰 성공을 하면서 바그너는 주변의 바그너주의자들에게 둘러쌓였고, 스스로는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바그너주의자(약자, 대중)의 의지를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 니체가 보기에 바그너는 이들의 의지를 실제 현현시키는 현대성의 얼굴로 작동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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