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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여성의 퇴화와 남성의 어리석음

by 홍차영차 2021. 4. 6.

여성의 퇴화와 남성의 어리석음

: <선악의 조건> 7장 우리의 미덕 232, 239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여성이 ‘여성의 본질’에 대해서 남성들을 계몽시키려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추악해져가는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 그녀가 우아하게 처신하고 유희하는 영리함과 기교, 그리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해주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영리함과 기교를 망각하기 시작하고, 쾌락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망을 통제하는 섬세한 솜씨를 망각하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 여성이 이런 식으로 학문적이 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최악의 취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이제까지 다행스럽게도 계몽한다는 것은 남성의 일이었고, 남성에게 주어진 천분이었으며, 남성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만’ 행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여성들이 ‘여성’에 관해 쓰는 모든 것을 보면, 여성이 과연 자신에 대해서 진실로 밝히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여성은 진실을 구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진실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여성에게는 진실만큼 낯설고 거슬리고 적대적인 것은 없다. 여성이 가진 최대의 재능은 거짓말하는 것이며, 최대의 관심사는 가상이며, 아름다움이다. 우리 남성들은 솔직히 고백하자. 우리가 여성에게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재능이며 이러한 본능이라고. <선악의 저편> 232

 

7장 우리의 미덕 마지막 부분은 여성에 대한 다양한 표현, 불꽃페미니즘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에 분노를 일으킬만한(?) 표현들로 가득차 있다. ‘여성’에 대한 이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니체 텍스트에서 여성은 생물적 여성과 여성적 면모를 모두 포함한다. 여기 저기에서 헷갈리게 쓰여진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준다. 여성은 한 곳에 머물기보다는 항상 이동하고 변화하며, 하나의 특정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나 뭔가를 생산할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여성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각적(정동적) 논리로 움직이며, 진리나 진실이 아니라 오류와 허구, 가상을 사랑한다. 또한 그는 유약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향해 움직이며, 그러기 위해 힘에의 의지를 작동시키는데 능하다.

반대로 니체에게 남성 혹은 남성적 면모란 딱딱하고 굳어져서 변하기 어려운 특성이고, 하나의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자신에게는 변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고 여기는 존재다. 그렇기에 니체에게 기존 철학과 학문은 모두 남성적이고, 근대의 계몽이라는 것은 정확인 남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니체에게 여성이 ‘학문적이 되기 시작한다’거나, ‘남성들을 계몽’시키려는 작업은 ‘최악의 진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성 최대의 재능인 ‘거짓말’, ‘가상’, ‘아름다움’을 무시하면서 점점 더 이성적으로,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계몽적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남성화된 여성’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 알렉산더 네하마스가 말하는 ‘삶의 조건으로 거짓’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고 자유 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여성이고, 여성적인 면모다. 우리는 “우아하게 처신하고 유희하는 영리함과 기교”, “쾌락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망”을 무시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성은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적 면모를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진실로 여성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를때가 많다.

 

… 그러나 ‘두려움을 잃어버린’ 여자란 자신의 여성적인 본능을 포기한 것이다. 남성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즉 남성 안에 존재하는 남자다움이 더 이상 원해지지도 육성되지도 않을 때 여자들이 전면에 나와 설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와 함께 여성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 프랑스 혁명 이래로 유럽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여성의 권리와 요구가 증대되는 것에 비례해서 감소되어왔다. ‘여성해방’이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 요구되고 촉진되는 한, 그것은 이렇게 가장 여성적인 본능들이 점점 더 약화되고 둔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의 주목할 만한 징후로서 입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에는 어리석음, 즉 제대로 자란 여성이라면 - 그러한 여성은 항상 영리한 여성이기도 하다 - 근본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남성적인 어리석음이 내재하고 있다. 그 대신에 여성은 어떠한 기반 위에서 가장 확실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한 후각을 상실하고 있으며, 여성 특유의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연습하고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 
… 사람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온간 종류의 음악 가운데 가장 병적이고 위험한 음악으로 여성의 신경을 망치고 날이 갈수록 그녀를 더욱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튼튼한 어린애를 낳는다는 여성의 궁극적 소명을 갈수록 더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 마치 인간을 교향있게 만드는 것과 인간이 허약하게 되는 것 - 즉 의지력이 약화되고 분열되며 병약하게 되는 것 - 이 항상 함께 진행되어왔으며,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여성들이 남자들에 대해 힘을 갖고 남자들에 대해서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의지력 덕분이지 학교 선생들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가르쳐주었던 것을 잊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존경심과 때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그녀의 자연이며 맹수와 같은 참으로 교활한 유연성이고, 장갑 속에 숨겨져 있는 호랑이 발톱이며, 순진한 이기심이고, 교육이 불가능한 내적인 야성이며, 그녀의 이해하기 어렵고 폭넓고 방황하는 욕망과 미덕이다. <선악의 저편> 239

 

여성은 남자다움이 남성 안에 존재할 때, 남성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일 때 바로 여성의 여성적인 면모,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맹수와 같은 참으로 교활한 유연성”, “장갑 속에 숨겨져 있는 호랑이 발톱”, “순진한 이기심”, “교육이 불가능한 내적인 야성”, “이해하기 어렵고 폭넓고 방황하는 욕망과 미덕”이 더 발휘될 수 있다. 놀랍게도 니체는 ‘여성의 퇴화’를 ‘남성의 어리석음’과 한 쌍으로 엮는다. 남성의 남자다움이 더 이상 육성되지 않기에 동시적으로 여성이 ‘남성적인 어리석음’을 내재하면서 퇴화하게 되었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여성들은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최대로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최악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내가 ‘나’로 형성되는 최고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니체적으로 말하면 강자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어려움을 자신을 고양시키는 최고의 양분으로 삼았으며, 어떤 것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위장과 이빨을 가지고 있다.

베토벤이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작품이 아름답다는, 넓고 깊은 감정의 폭을 표현하기때문만이 아니다. 베토벤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자신이 ‘베토벤’으로 되는 최고의 조건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토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베토벤 하면 우리는 웅장하고 거대하며 진지한 운명(5번), 영웅(3번)을 떠올린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렇게 단 하나의 형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그가 완성해낸 음악형식은 뉴턴, 칸트와 함께 근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략 1790년부터 1822년에 걸쳐 작곡된 베토벤의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지금 클래식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부분(형식)뿐만 아니라 1800년대 후반의 낭만주의적 표현과 현대음악의 시초까지 들려주고 있다. 재능의 탁월성때문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소리를 점점 더 들을 수 없게된 신체적 조건때문이다.

베토벤은 절대음악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모티브를 사용하여 구조적인 음악(그림처럼 모티브를 대칭/역대칭/상하대칭/쪼개서 배치 등등)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시기에 소리의 진동, 베이스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들을 활용하여 (아주 현대적으로 들리는 곡들을) 작곡하게 된 것 역시 청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신체적으로 점점 더 나빠지는 조건을 자기가 ‘자기’가 되는 톡특성의 생산의 필요 조건으로 삼았다. 죽을 때까지 그의 작품이 실험적이 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도 이성과 감성, 앎과 무지, 정신과 물질,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사물이 그 사물이 되는 것, 내가 ‘나로’ 구성되는 것, 학교가 학교로서 작동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 자체의 본질로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순간 그 사물과 내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지, 내가 주어진 조건들에서 어떤 반응을 하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을 기준삼아 그 모델처럼,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려고 한다. 어떻게 해도 그런 시도는 내가 ‘나’가 되는 길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내가 가진 신체적, 관념적, 환경적 조건들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삶이라는 것에는 그러한 나를 최대한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도에 실패란 없다. 고정된 목표가 없기 때문이고, 내가 내가 되는 것에 어떤 이상과 모델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 실험이고,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목소리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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