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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감각의 관점주의 - 삶의 조건으로 거짓(4)

by 홍차영차 2021. 4. 3.

감각의 관점주의

 

 

 

모든 도덕은 자유방임과 대립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일종의 폭정이고, 또한 ‘이성’에 대한 일종의 폭정이다.  … 모든 도덕에서 본질적이고 귀중한 점은 그것이 장기간에 걸친 강제라는 점이다. 스토아주의나 포르 루아얄이나 청교도주의를 이해하려면, 모든 언어가 힘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사용했던 강제를 - 즉 운율상의 강제, 각운과 리듬의 강제를 -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략적인 의미에서나 엄밀한 의미에서나 노예적인 예속은 정신의 훈련과 훈육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수단인 듯이 보인다. 모든 도덕을 이 점에 비추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도덕 속에 깃들어 있는 ‘자연’은 자유방임과 지나치게 분방한 자유를 증오하도록 가르치며, 제한된 지평에 대한 욕망과 가장 가까운 과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을 심어준다. 즉 삶과 성장의 조건으로서 우리의 시야를 좁힐 것을, 어떤 점에서 본다면 어리석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누군가에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서 복종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파멸하게 될 것이며 그대 자신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자연의 도덕적 명령이라고 여겨진다. <선악의 저편> 188

 

요즘 음악감상세미나(이후 세미나)가 아주 흥미롭다. 음악 자체를 더 깊고 넓게 듣게 되었다는 것도 있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그동안 머리로만 이해하던 철학 개념들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주기때문이다.

 

cafe.naver.com/bewithmusic (콩브레마을 - 음악세미나 신청은 여기에서)

 

지난 주에는 말러 교향곡 1번 3악장을 함께 들었다. 사실 말러 1번 교향곡은 세미나 이전부터 많이 들었고 좋아하던 작품이다. 적어도 수십번은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미나에서 스코어를  토대로 하는 설명을 듣고나서 함께 음악을 들으면 전혀 새롭게 들린다. 새롭게 들린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분석이 들어 있는 스코어를 보면서 음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스코어를 그림으로 보면서 이해하는 수준이다. ^^;) 어떤 방식으로 클라이막스로 만드는지, 어떤 방식으로 분위기를 바꾸는지(조성변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두번째, 여기가 중요하다. 정말로 들리지 않던 악기 ‘소리’가 들린다. 스코어*를 통한 분석을 듣고 나면,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호른 소리, 팀파니 소리가 하나하나 들린다. 이건 정말 신세계다! 항상 걸어다녔던 길인데,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고, 하나의 소리로 들리던 음악이 각자의 악기 소리로 들린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세미나를 하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전에 들리지 않던 트라이앵글 소리가 들려서 너무 기쁘다고 이야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적으로 나왔던 팀파니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이 나와서 농구공을 서로 주고 받게 할텐데, 몇 번을 주고 받는지 파악해달라고 요청한다. 사람들은 오로지 농구공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화면 사이로 아주 천천히 지나가는 아주 특이해서 못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털이 달리고 아주 커다란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한다. 와우! 별 것 아닌 ‘계단’이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 되고, 너무나 당연한 ‘남녀 화장실’ 표시가 성소수자에게는 공포와 수치의 장소가 된다는 것. 이것을 보지 못한 것은 내가 전혀 다른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을 단순한 관점차이 혹은 모든 체험은 해석된다라는 식의 인식만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좀 더 계보학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 자체가 사실은 ‘신체’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가시광선에 적합한 시각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충류나, 곤충, 물고기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어떤 우연 혹은 필연성을 통해서인지 모르기만 총천연색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언어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는 것은 우리의 귀가 각자의 언어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소리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각각의 자극에 적응하도록 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과정이 “삶과 성장의 조건으로서 우리의 시야를 좁힐 것을, 어떤 점에서 본다면 어리석음” 혹은 ‘거짓말’을 장착하게 되는 순간인듯하다.

 

우리의 눈은 어떤 주어진 자극에 반응할 때, 특이하고 새로운 인상을 붙잡기보다는 이미 자주 만들어낸 적이 있었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만들어내는 것을 편하게 느낀다. 전자의 경우가 훨씬 많은 힘과 ‘도덕성’을 요구한다. 어떤 새로운 것을 듣는 것은 귀에는 고통스럽고 성가신 일이다. 낯선 음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 가장 특이한 체험을 할 때도 우리는 역시 그렇게 한다. 즉 우리는 체험의 대부분을 지어내며 어떤 것을 관찰하든 간에 ‘꾸며내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옛날부터 거짓말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보다 고상하고 위선적으로 말한다면,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술가라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192

 

‘거짓’, ‘오류’, ‘단순화’가 어떤 것인지 좀 더 세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책을 볼 때도 우리는 모든 단어를 읽기보다는 아주 익숙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추측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상상을 펼칠 뿐이다. 나무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잎, 가지, 색깔, 형태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소리를 듣고,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고 성가신 일”일 뿐 아니라 “훨씬 많은 힘과 도덕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음악 세미나 이전에 호른과 팀파니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거짓이지만 거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내 귀의 구조와 세포, 그리고 뉴런의 반응패턴은 오로지 편한 소리, 익숙한 소리, 이전에 들어봤던 소리에만 반응하도록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구조가 바뀌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세미나에서 음악분석을 듣고 이해하려고 하고, 다시 음악을 들을 때 감각을 열고 들으려고 했을 때 내가 듣는 음악은 이전의 음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소리로 들렸다. 에너지와 힘의 투여,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힘에의 의지가 여기에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활발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종종 상대방의 얼굴이 그가 말하는 사상이나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으로 내가 믿는 생각에 따라서 명료하면서도 섬세하게 규정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시각 능력은 사실 이 정도로 명료하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그의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나 눈에 담긴 표정의 미묘함은 내가 지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상대방은 전혀 다른 표정을 보였거나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 192

 

<선악의 저편> 192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체는 관점주의를 사람의 얼굴표정까지 확대한다. 한 마디로, 내가 보는 상대방의 얼굴은 사실은 내가 만들어낸 표정이라는 것! 여기서 말하는 얼굴(표정)이란 들뢰즈가 말하는 잉여라고 봐야한다. 미묘한 얼굴근육의 움직임, 눈의 떨림, 입술의 삐죽거림, 벌름거리는 코, 고개짓과 같은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행해지는 수많은 잉여들. 내가 만들어낸 잉여들이 내가 의식하지 못한 힘에의 의지의 표출이라고 한다면, 내가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잉여들은 또한 내 신체감각의 관점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기호해석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여기까지 오니, 스피노자의 감정역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은 내 신체의 상태를 말해줄 뿐이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움직임과 소리까지도 악하다고 느끼고, 가뿐한 신체 상태에서는 적대적인 상대방의 모습까지도 사랑스럽게 느낀다. 우리가 반려동물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게 되는 걱은 어쩌면 반려동물은 아무런 (나를 해코지할) 의도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살기 위해서 거짓, 오류, 허구, 무지를 필수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 스코어Score : 오케스트라 혹은 합창에서 모든 성부, 모든 악기 악보를 모두 포함하는 악보. 지휘자가 보는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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