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니체

거짓과 창조 - 삶의 조건으로의 거짓 (3)

by 홍차영차 2021. 3. 31.

거짓과 창조

: 삶의 조건으로 거짓 (3)

 

 

 

너희가 세계라고 불러온 것, 그것도 너희에 의해 먼저 창조되어야 한다. 너희의 이성, 너희의 이미지, 너희의 의지, 너희의 사랑이 세계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너희의 행복을 위해, 깨친 자들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2행복한 섬에서)

 

‘진리는 창조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창조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것을 발견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를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창조된 것을 발견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럽적 질병’의 증상을 억눌러왔던 기독교적 ‘믿음’을 되찾으라는 말은 아닐테니 말이다.

이 부분도 소화하기 쉽지 않은데 니체는 ‘발견’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우리가 창조한 결과”이고, 그렇기 때문에 해석을 통해 “실제 세계는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감히 꿈꾸지 못하던 새로운 방식”(<니체, 문학으로의 삶>, 117쪽)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니체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이분법을 극단까지 몰아가는 것 같다. 물질과 정신! ’세계는 텍스트다’라는 말은 니체에게 단순한 은유를 넘어선다. 보이는 세계는 실재 세계이지만 우리의 해석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상상과 진리가 같은 선상에 있다는 말이나 거짓에서 나온 진리라는 주장은 모두 관념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신승리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전경을 강조하고 배경을 무시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모습이 변화할 수 있을까? 해석을 통해서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할까?

관점주의 해석이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이다. 관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관점주의에서 모든 해석은 똑같은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 더 훌륭한 해석이 존재한다. 관점주의의 해석은 ‘다만’ 해석일 뿐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것임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해석이 지금 이 세상에서 동작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면서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의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서양음악 어법을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된다. 다장조(C)의 세계에서 중심은 도와 솔이고, 사장조(G) 세계에서는 솔과 레가 중심이다. 똑같은 12음이지만 무슨 장조인가에 따라서 전경과 배경이 달라지고, 음악 자체가 달라진다. 하지만 관점의 변화는 조성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조성적인 음악으로 노래했던가?” 니체가 처음 바그너에게 느꼈던 엄청난 감흥과 감동을 바로 이런 시도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조성을 극한까지 밀면서 조성 중심이기보다는 하나의 모티브를 각각의 인물, 장소, 상황에 매치시키는 새로운 음악을 - 그리스 비극 처럼 - 창조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밀어붙여보자면, 조성과 멜로디 중심인 서양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멜로디보다 템포, 리듬에 중심을 두고 노래했던 우리나라 국악이나 아프리카 노래도 있다. 사실 5음계라는 말로 국악이나 남미의 음악을 평가하는 것 역시 서양음악의 관점 속에서 내려지는 가치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화성/비화성이라는 해석을 넘어서는 음악을 증명해낸다면,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새로운 관점으로의 세계 해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