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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자유정신의 소유자들 - 호메로스적 인간과 근대적 인간 그 사이에서 : 삶의 조건으로서의 거짓 (2)

by 홍차영차 2021. 3. 23.

자유정신의 소유자들 - 호메로스적 인간과 근대적 인간 그 사이에서

: 알렉산더 네하마스 <니체, 문학으로서 삶> 2장 + <선악의 저편>

 

 

데카르트

 

사악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잔인할 정도로 탐구적이며, 포착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붙잡으려 하고,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것도 소화해내는 이빨과 위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민한 감각을 요구하는 어떠한 수공업적인 작업도 할 용의가 있으며, 넘치는 ‘자유의지’ 덕분에 어떠한 모험이라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이는 우리가 고독에 대해서 태어날 때부터 충성을 맹세한 질투심 많은 고독의 친구들이며, 우리 자신의 가장 깊고 가장 어둡고 가장 밝은 고독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선악의 저편>, 2장 자유정신, 44)

 

니체가 묘사하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의 모습은 곧바로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아킬레우스는 생각과 행동에 간극이 없으며, 사물 자체의 본질이나 속마음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아니 그는 문자 이전 시대의 인간이기에 속마음을 갖지 않았고 대신에 신들의 질투와 유혹에 대항해야 했다.

트로이 전쟁(그리스vs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는 그리스가 전멸할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전투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리품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다룬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문자 이전의 인간에게 다른 꿍꿍이 혹은 속마음은 없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정신(자아)가 아니라 수많은 신들만이 - 질투의 신, 사랑의 신, 전쟁의 신, 불화의 신, 지혜의 신 - 있을 뿐이다.

 

아킬레우스

 

그리스인들은 개인적 자아를 갖지 못한 미개인인가? 혹은 그리스인들은 우리보다 지성적으로 떨어진 사람들인가? 세계와 자신과의 매개(정신)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보이지도 않는 신들을 믿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그리스인들은 정말 신화를 믿었을까?” 고대 그리스에 대한 믿을만한 연구자인 폴 벤느를 의지해 대답해보자.* 한 마디로 그들은 믿으면서 믿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지금과 다른 매개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신(화)들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인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정신(자아, 속마음)’이 아니라 ‘신(화)’을 발명해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창조한 것이 발견된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았다. 분명 그것은 거짓(?)이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거짓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살펴보면 ‘삶의 조건으로서의 거짓’을 이야기하는 네하마스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그리스 신화(비극)를 넘어서 다른 해석을 제시해야만 했다. 낙타와 사자를 넘어 어린아이 되기!** 여기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의식을 갖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영원한 어린아이”, 성숙을 겸비한 어린아이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거짓이면서 실재’ 그리고 “성숙은 놀이에 임하는 어린아이의 진지함을 되찾는 데 있다”(<선악의 저편>, 94)고 말한 이유이다.

 

초기 니체는 비극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극은 신화로 메우기에는 너무나 깊고 넓었다.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여기는 근대인 누가 “탄생은 범죄”이고 “존재 자체가 불의”라는 말을 긍정할 수 있을까. 니체는 이성, 정신, 의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었다. 중력의 악령이 계속해서 고자질하는 ‘고통의 반복’에 대해서 답해야만 했다. 정말 니체는 이 문제로 인해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 것 같다.

 

단순하고 하찮은 장남감을 실재로 만드는 어린아이의 눈과 손이 필요하다. 살아가기 위해서 세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는 살아갈 때 단순화하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취하는 전제들을 가능한 대안이 아니라 최상의 대안으로 믿어야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이전의 장난감을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로운 장남감을 다시 실재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진리는 창조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시 창조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것을 발견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

 

 

 

*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이학사 (폴 벤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고대 그리스 연구 분야 교수였고,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논의한 ‘주체와 진리’에 대한 논의들에 토대를 제공했다. 헤르만 프랭켈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과 함께 그리스를 살펴볼 때 빼 놓을 수 없는 연구자. ^^)

**낙타는 기존의 규칙과 법들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고, 사자는 이러한 규칙들을 파괴하거나 저항하는 사람. 어린아이는 자신만의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는자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1) 

*** 그리스 비극에는 고통, 죽음이 곳곳에 묻어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그리스인들은 낙담하지 않았다. 니체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전제하는 ‘존재는 부정의’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우주는 순수한 1차 물질, 원소로 존재했다. 하지만 세계가 형성되면서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원소와 원소가 만나야 했다. 즉, 존재가 탄생하기 위해서 우주적 질서, 우주적 도덕이 망가져야했다. 존재는 그 탄생 자체가 부정의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기에 우주적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서 죽음, 해체는 필수적이다. 한 마디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탄생은 범죄이며, 성장은 일급의 강도질”일 뿐이다.니체가 보기에 그리스인들은 존재 자체가 불의, 현존 자체가 유죄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책임은 인간이 아닌 신들에게 있다. 내가 지금 저지른 부정의는 내가 아니라 신 - 예를 들어, 불화의 신이나 술의 신 디오뉘소스, 신들의 질투 -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결과는 또한 인간이 책임지는 오묘한 방식! 아직까지 가책이나 양심의 문제라는 세련된 방식은 그리스인들에게는 고안되지 않았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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