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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삶의 조건으로서의 거짓

by 홍차영차 2021. 3. 10.

삶의 조건으로서 거짓과 자유정신

: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 2장

 

비록 거짓이지만 절대적인 가치를 믿는 것이 내게는 삶의 조건으로 보인다.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니체가 거부한 것은 “모든” 사실을 설명해 줄 완벽한 이론이나 해석이 존재한다는 기존의 관념이다. 니체는 견해와 관습, 삶의 방식을 “해석”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속해서 재조정할 수 있으며, 어떤 세계관도 특정한 이해관계의 가치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 선과 악, 지식과 무지는 처음부터 니체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니체로 들어가는 입문서인 <선악의 저편>은 거두절미하고 지식과 진리의 가치를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진리의 의지에 대한 질문, 즉 “우리는 이러한 진리에의 의지의 가치에 대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거짓을, 불확실성을, 심지어는 무지를 원하지 않는가?”(<선악의 저편> 1) 진리에의 의지는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진리의 가치에 대한 질문!

“어떻게 어떤 것이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을까? 어떻게 거짓으로부터 진리가, 기만의 의지로부터 진리의 의지가 생성될 수 있을까?”(<선악의 저편> 2) 계보학적 탐구를 따라가보면, 진리, 진실 및 이타성은 다름 아닌 기만, 이기주의 및 탐욕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니체는 진리와 거짓, 지식과 무지, 선과 악이 서로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상반되기보다는 동일한 연속 직선 위에 찍힌 점과 같고,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의 특징도 이러한 관계의 결과라는 것이다.

관점주의를 참/거짓과 관련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지각된 것은 ‘특정한 관점’에서 지각된 세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설명해보면, 화가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그릴 수는 없다. 어떤 활동,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것들을 전경으로 가져오면서 강조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하면서 배제할 수밖에 없다. 지식(앎)에 있어서 왜곡 혹은 거짓은 필수적이다.

 

“삶은 논쟁이 아니다. 우리는 생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었다. 육체, 선, 평면, 원인과 결과, 운동과 정지, 형식과 내용 같은 것을 가정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믿음의 내용들이 없었더라면 주어진 삶을 견디며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믿음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 삶은 논쟁이 아니다. 삶의 조건은 거짓을 자체에 포함하고 있는지 모른다.”(<즐거운 학문> 121, <선악의 저편> 4 참조)

 

니체는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기본적 믿음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어른에게 단순하고 하찮은 장난감이 아이의 손에 쥐어지면 장난감이 아니라 실재가 된다’는 니체의 은유는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 세계를 단순화하는 인간은 단순화하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해석, 새로운 회화, 새로운 이론, 새로운 소설과 새로운 도덕을 창조하는 인물은 그것이 가능한 여러개의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창조활동은 불가능하다. 그는 자신의 견해, 해석, 회화, 이론, 소설, 혹은 도덕이 매우 훌륭한 것, 아니 최상의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니체는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창조적인 삶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것이 발견된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철학자 혹은 자유정신을 가진 인물들은 이렇게 “악에 대해 호기심이 많으며 무자비하게 철저한 탐구자들이다. 삼킬 수 없는 음식도 씹고 소화할 수 있는 이빨과 위장을 가지고 불가해한 신비를 파헤치는 사람들이다.”(<선악의 저편> 44, <즐거운 학문> 351) 니체에게 자유정신은 일반인의 삶에 필수적인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인물이고, “진리의 부재를 의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삶은 가능한 해석을 무한히 증가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창안해 내는 것, 자발적으로 스스로 과거의 견해를 단순한 해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짓이 진정으로 삶의 조건이어야만 거짓을 삶의 조건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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