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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17세기, 스피노자는 왜 새로운 에티카(윤리)를 써야했을까

by 홍차영차 2020. 3. 17.

17세기, 스피노자는 왜 새로운 에티카(윤리)를 써야만 했을까?



신앙의 시대에서 형성되었던 합리성이 아닌 과학의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성으로 구성된 새로운 에티카가 필요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과학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초기 근대 시대에서 벌써 탈근대적인 에티카를 바라봤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사후에나 말할 수 있는 기원을 따지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그보다는 스피노자가 태어나고 자랐던 17세기 전후의 시대를 계보학적으로 살펴보면서 스피노자가 받았던 정서적인 반응affect을 모방해보면 좋겠다.


스피노자는 유럽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 최초의 영토 전쟁이라는 ‘30년 전쟁(1618~1648)’이 한참 일어나던 1632년에 태어났다. 1, 2차 세계 대전을 제외한다면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30년 전쟁에는 이미 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프랑스, 영국, 스페인을 포함하여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면서 수십, 수백개의 공국(도시 국가?)으로 나눠져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지역까지 모두가 이 전쟁의 회오리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직 하나의 국가로도 형성되지 않았던 ‘국가’들 모두가 서로를 적대하면서 싸워야 했을까?


종교적 분열 (가톨릭 & 신교(루터/칼뱅))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이루어졌지만 이 화의를 통해서 이득을 본 것은 고작 ‘루터파 기독교’뿐이었다. 루터파에 이어서 거세게 바람을 일으켰던 ‘칼뱅파’가 빠졌다. 다행히 1598년에 이루어진 낭트 칙령으로 신교의 자유가 확보되었다. 하지만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유럽 곳곳에서는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가톨릭의 최대 지원국가인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신교를 바탕으로 하는 나라들이 기세를 떨칠수록 그들과의 전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빨 잃은 호랑이라고는 하지만 교황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현재 UN이 보여주는 위치가 17세기의 가톨릭과 교황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실질적인 힘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상태.)

신성로마제국으로 일컬어지는 현재 독일 지역의 수백개의 공국들은 주로 신교를 바탕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그렇기에 에스파냐/프랑스와 그리 좋은 관계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17세기 가장 자유로운 도시이자 국가로 알려진 네덜란드는 1588년도에 독립했지만 호시탐탐 에스파냐는 네덜란드를 다시 점령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는 구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졌고, 독일 지역의 신교 공국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정치적 분열 1 : 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것인가? (합스부르크 왕조 / 독일 공국의 군주들)

힘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갖는 권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물리적 힘과 명분이 합쳐지면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일 공국에서는 절대로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황제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합의가 독일 공국 모두에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게 문제였다. 독일 공국에서 많은 공국들이 신교(루터/칼뱅)를 인정했지만 또한 다수의 공국들은 여전히 가톨릭을 삶의 근원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치적 분열 2 : 신성로마제국의 지역 내에거 누가 더 강한 공국이 될 것인가? (선제후들간의 세력다툼)

황제라고 하면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제국 내의 실질적인 내용들은 7개의 선제후들(마인츠 선제후 ,쾰른 선제후 , 트리어 선제후, 보혜미아 왕, 라인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결정으로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선제후 7명은 제국의 진정한 통치자였다. 그들이 아니면 황제가 선출될 수 없었고, 그들의 동의 없이는 의회도 소집될 수 없었다. 선제후 의장은 황제조차 모르게 회의를 소집할 수 있었으며, 거기서 반포된 명령은 황제의 승인 없이도 구속력을 가졌다. 선제후단의 또 한 가지 특징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황제는 세금을 신설하거나 개혁할 때, 토지를 처분하거나 몰수할 때, 동맹을 맺거나 전쟁을 선포할 때 반드시 의회를 소집해서 논의해야 했으며, 독자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입법, 재정, 군사 조직도 황제가 거의 관장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7명의 선제후간의 세력 다툼과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이뤄졌다. 누구도 한 사람의 선제후가 독점적인 힘을 갖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니 종교적 이유때문에 벌어졌던 사이가 동시에 이런 정치적 이유로 연합하고 헤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사실 이런 이유로 독일이 그렇게 늦은 시기까지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


국가적 분열 :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 vs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분명 종교적으로 볼 때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구교 가톨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가톨릭 중심으로 나라를 형성했고, 절대 왕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는 시류를 역행하면서 1685년 낭트 칙령의 폐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독일 공국 내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두 국가 중 한 나라가 조금 더 큰 힘을 갖게 될 때의 위협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30년 전쟁 후반에 프랑스는 종교적으로는 분명 가톨릭을 대변했지만, 전쟁에서는 반대로 신교를 지원하기에 이르게 된다. 30년 전쟁이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 최초의 영토 전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누구도 종교 때문에 싸운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종교는 단순히 더 넓은 영토와 이익을 얻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군사적 분열 : 용병의 존재

어떻게 보면 종교적, 정치적, 국가적 분열보다도 이 ‘30년 전쟁’에 동력이 되었던 것은 용병의 존재였다. 현재는 국가 내에 상비군을 두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군인의 존재는 용병과 거의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군인은 민족과 국가에 복종하기보다는 계약에 의한 깃발에 의지할 때가 많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지금 상비군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비군을 유지한다는 것은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상비군을 60만 명이라고 보면 이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무기를 공급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거의 200만명에 가까운 군인과 국가 예산의 10%가 넘는 돈을 군대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보자. 17세기에는 대량 생산도 없었고, 국가가 월급을 줄 수도 없었다. 용병을 지도하는 장수나 군주가 개인의 돈을 풀어서 군대를 유지한다. 그러다보니 방금 에스파냐의 군대였다가 다음 주에는 에스파냐와 싸우는 군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언제라도 약탈자로 변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속한 월급이 주어지지 않으면 장군 혹은 그 어떤 군주라도 마을을 약탈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민들은 점점 더 궁핍해지고, 이렇게 궁핍해진 시민들은 용병이 되고, 이 용병들을 쓰기 위해서는 어디에서간 전쟁이 필요했다. 전쟁이 없다면 전쟁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스피노자는 왜 17세기 중반에 새로운 에티카를 써아먄 했을까? 그동안 사람들의 정신 공간을 형성했던 신 중심의 기준과 틀이 무너지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작은 차이들로 인해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의 저자는 ‘30년 전쟁은 대량 살상 무기가 발명된 1, 2차 세계 대전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최고로 많은 시민들이 죽은 잔혹한 전쟁,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이라고 묘사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국가적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에티카를 쓰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그동안 신 중심의 합리성으로 구축해왔던 체제에서 벗어나 과학이라는 인과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17세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에티카를 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도 니체가 19세기를 거치면서 하려고 했던 작업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그 어떤 기준(진리)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에티카를 구성해낼 수 있을까. 각자가 자신만의 에티카를 구성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것인지 자신의 삶을 무대로 실험하고 모험했던 것이 니체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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