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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호모-파시오날리스의 일상기술 에티카 2) 필연성과 복합개체

by 홍차영차 2020. 4. 26.

스피노자 <에티카>를 읽다보면 뭘 알고 뭘 모르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쓰지 않으면, 정리하지 않으면 신체에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2020스피노자를 함께 공부하고 있는 히말라야와 뿔옹이 뭔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가면서 정념적 인간(호모-파시오날리스)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익혀봐요! ^^


호모-파시오날리스의 일상기술 에티카 2) 필연성과 복합개체

히말라야는 큰 물고기, 뿔옹은 작은 물고기?

 


 

히말라야

 

 

 


 히말라야와 뿔옹이 함께 퇴근길인문학 튜터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 친구들이 우리에게 당부한 말은 “너희 둘, 또 싸우면 안 돼!”였다. 이 둘은 서로 잘 싸우기로도 또 각자 다른 이와 잘 싸우기로도 ‘소문난’ 인물들이다. 고집세기로 유명한 이 둘은 주위 사람들이 싸움으로 여길만큼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인 적이 실제로 몇 번 있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단 몇 번 밖에는 없다! -.-;) 그러면서도, 이들은 ‘고등인문’부터 ‘파지스쿨’, 파지사유 매니저를 거쳐 퇴근길대중지성까지, 계속 뭔가를 함께 해오고 있다. 

 돌이켜보건데 문탁에서 함께 지내 온 몇 년 간, 이 둘이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시작할 때마다 서로 너~무 마음이 잘 맞아서 혹은 이전부터 철썩같이 약속을 하고 그랬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떤  순간, 그야말로 결정적 순간에 중요한 일들은 결정되면 둘은 군말없이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 같이 일을 하다가 서로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었기에, 그런 사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언제나 ‘혹시나 또?’ 하게 된다.  

 그런데 ‘2020 퇴근길대중지성’의 주제를 스피노자로 바꾸면 같이 튜터를 해보겠다는 히말라야의 한 마디에, 뿔옹은 몇 개월 간이나 애지중지 키워오던 ‘맑스와 폴라니’의 기획을 포기했다.  이를 본 어떤 이들은, 특히나 우리의 싸움을 기억하는 이들은, 마치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듯, 이제 '뿔옹이 히말라야한테 먹히는 신세가 되었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진실일까? 

 


 

너와 나의 연결고리

 히말라야와 뿔옹이 맨처음으로 ‘싸웠다’고 소문이 났던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고등학생들과의 인문학 공부에 그 때도 뒤늦게 튜터로 합류한 히말라야는, 세미나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뿔옹을 향해 “왜 이런 책을 골랐냐”고 (아마도 따지듯이) 물었(을 것이)다. 그러자 뿔옹은 ‘버럭’하며 “그걸 지금 왜 물어보는데”라며 응수했다. 

 자연전체인 신의 관점에서 보면, 뿔옹이 책을 선정한 내적 혹은 강제된 필연성이 있고, 히말라야가 그 필연성을 이해 못하게 된 필연성이 있다. 자연전체는 모두 촘촘한 그물망처럼 필연성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주에는 공허한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촘촘하게 연결되어 분할될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신이 유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강물과 비와 구름은 우리 눈에 서로 다른 실재이지만,  강물이 바로 구름이자 비이고 다시 강물인 것처럼 말이다. 

 

 “자연에는 공허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며...부분들은 실질적으로는 구별될 수 없다는 것, 즉 물질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 있어서, 분할될 수 없다.” 

 

 그러나 매순간 자기가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조차 알아볼 수 없는 우리의 눈은, 촘촘히 연결된 존재자들의 필연성들을 모두 알아 볼 수가 없다. 우리 눈에 띄는 필연성들은 매우, 드문드문하다. 그래서 히말라야와 뿔옹은 서로의 필연성에 대해 거의 모른다. 그 모르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거나, 상대가 자유의지로 다르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믿을’ 때 인간들은 다툰다. 

 그러나 어쨌거나 둘은 각자 ‘현재 자기 시점의’ 내적 필연성을 최대한 펼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지난 글에서 말했듯, 자연전체인 신의 필연성을 지닌 신의 변용들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너와 나의 다른 리듬

 내적 필연성이 다른 뿔옹과 히말라야는 그 신체와 행동의 특성 역시 확연히 구별된다. 지난 해 공유지의 회계를 맡아 보던 히말라야는 500원짜리 동전 하나만 안맞아도 안달복달했는데, 올 해 같은 일을 하는 뿔옹은 9천원 정도 안맞는 것쯤은 느긋하다. 그의 강의를 듣고 감명받아 문탁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만큼 뿔옹은 달변이다. 그러나 뾰족한 말투로 뿔옹을 ‘버럭’하게 만들었던 히말라야는, 그의 글을 읽고 강의를 들으러 온 이들이 그냥 글만 읽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만들만큼 눌변이다.

 비와 구름이 분별되듯 히말라야와 뿔옹을 우리가 확실히 분별할 수 있는 건 각 존재가 지닌 각자의 고유하고 독특한 ‘운동과 정지’ 즉 상대속도 덕분이다. 이는 생명이 살아가는 동안 자기 자신을 계속 재생산하고 확대시키는 자가생산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체계가 존재마다 다르기 때문에 세계에는 무한하게 다양한 존재가 있고,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인 자연 전체는 유일한 동시에 무한할 수 있다.

 존재들의 ‘운동과 정지’는 그저 외형만 분별시키는 게 아니다. 이 자가생산 체계는 다음 순간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각 존재가 매순간 지닌 변화하는 힘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비슷한 경향성이 있다고 해도 히말라야와 대소설가 하루키가 글을 쓰는 세세한  특성들은 다른데, 그 세세한 차이들로부터 비롯되는 힘의 차이, 즉 그 둘의 글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이 힘은 같은 존재에게도 매순간 달라진다. 컨디션이 좋을 때의 히말라야와 몸이 아플 때의 히말라야는 다른 힘의 정도로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그런 힘은 그대로 그가 쓴 글에 표현된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구분되는 ‘운동과 정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종합적인 힘의 강도’로써 각 존재의 본질은 분별된다.  

 

우리 신체의 끝은 어디인가

 그런데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를 각자 ‘운동과 정지’를 지닌 단순한 개체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지는 복합개체로 설명한다. 히말라야는 한 사람이지만, 그 한 사람 안에는 단순하거나 복잡한 다양한 개체가 합성되어 서로 각자의 ‘운동과 정지’를 주고받고 있다. 히말라야의 각 부분들은 각자 알아서 자기생산체계를 돌리고 있기에, 그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알기 어렵다. 

 반대로, 히말라야는 자기보다 더 크고 복잡한 개체의 부분일 수도 있다. 그는 어떤 때는 공유지 매니저, 또 다른 때는 뿔옹과 함께 퇴근길대중지성의 복합개체를 구성한다. 물론 뿔옹과 히말라야가 서로 다른 운동과 정지의 힘을 지닌 만큼, 뿔옹이 회계를 맡을 때와 히말라야가 회계를 맡을 때 매니저 복합개체는 서로 다른 운동과 정지의 힘을 지닌다. 그러면 스피노자처럼, 자연 전체가 하나의 개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본성이 다른 다수의 개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다른 개체를 생각한다면, …. 이러한 제2, 제3의 개체를 생각한다면, …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면, 우리는 전체 자연이 하나의 개체이며, 그것의 부분들, 즉 모든 물체들이, 전체로서의 개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않고,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인 히말라야의 입장에서는, 전체 자연이 하나라는 말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역시 종종 자기 신체가 확장된 것처럼 느낄 때가 더러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맑스와 폴라니의 책을 보는 순간 뿔옹을 떠올릴 때, 히말라야의 의식이 아무리 ‘아니’라 부정해도 그는 뿔옹과 복합신체를 형성하고 있을지 모른다. 비록 바로 옆에 붙어 있지는 않더라도 둘은 서로의 몸체가 뭔가를 행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각자 삶의 변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비록 우리가 자연 전체가 하나임을 인식하기는 힘들지라도, 우리의 신체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어떤 ‘운동과 정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 신체의 범위와 그것이 지닌 힘은 매번 다르게 결정되는 것이다.

 

 

 

***

 

 뿔옹은 이전에 함께 공부한 퇴근길대중지성팀 몇몇이 스피노자를 좀 더 이어 읽고 싶어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본인도 그 스피노자를 6개월만에 끝내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게 한편으론 아쉽기도 한 차였다. 이런 사정들을 모른다면, 한 고집 하기로 소문난 뿔옹이 자기 주장을 바로 접고 히말라야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하는 것을 보고서, 마치 작은 물고기 뿔옹이 큰 물고기 히말라야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연 속의 작은 물고기와 큰 물고기는 우리 눈에 명확하게 구분된다. 한 사람의 뿔옹과 한 사람의 히말라야도 그렇다. 그러나 한 사람의 뿔옹이 구성하고 있는 복합신체와 한 사람의 히말라야가 구성하고 있는 복합신체는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각자는 매 순간 다른 것과 결합해서 똑같은 한 사람이라도 그가 구성하는 복합신체가 매번 변하고, 그 복합신체의 본질이 지닌 힘 역시 변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세워놓은 계획을 변경한 순간에, 뿔옹의 본질은 어쩌면 큰 물고기 히말라야에게 잡아먹힌 작은 물고기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계획을 바꿔 준 고마운 뿔옹을 만날 때마다, 히말라야는 굽신거리며, 노예처럼, 그가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있다! 그는 매주 뿔옹한테 글쓰기 숙제를 받고, 뿔옹 마음에 들 때까지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고친다. 이쯤되면, 과연 누가 누구에게 먹힌 것인지!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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