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피노자

호모-파시오날리스의 일상기술 에티카 1) '자유의지'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by 홍차영차 2020. 4. 26.

스피노자 <에티카>를 읽다보면 뭘 알고 뭘 모르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쓰지 않으면, 정리하지 않으면 신체에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2020스피노자를 함께 공부하고 있는 히말라야와 뿔옹이 뭔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가면서 정념적 인간(호모-파시오날리스)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익혀봐요! ^^

 

호모-파시오날리스의 일상기술 에티카 1)

‘자유의지’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히말라야 



 

2019년이 끝나가는 어느 날, 뿔옹이 다가 와, 2020년 퇴근길대중지성 튜터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겐 이미 2020년의 명확한 플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고등학생이 되는 딸을 위해 그간 (공부한답시고)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학부모 노릇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함께 모시고 살게 된 노모에게 그간 (공부한답시고)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효도를 할 것이다! 책에 대한 욕심도 다 버릴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정말 진지하게 결심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간 나는, 당장 내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우선, 버릴 책들과 남겨 둘 책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스피노자의 책들을 거의 남겨두는 쪽으로 보내고 있자니 문득, 뿔옹의 제안이 다시 떠올랐다. ‘스피노자면 몰라도, 맑스와 폴라니라니!’ 반짝이는 표지의 맑스 전집들과 두툼한 폴라니의 책은 이미 쩌~어기 버리는 쪽에 분류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뿔옹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는 생각지도 않게 어제 혼자 했던 생각이 튀어나왔다. “스피노자라면, 같이 했을 텐데...” 그러자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그럼, 스피노자 할까?” 에이, 고집 있기로 유명한 사람이 왜 저래, 그냥 하는 소리겠지 했다.

잠시 후 기획회의 시간, 그는 히말라야가 스피노자라면 같이 한다고 했다고, 프로그램을 완전히 다시 기획 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놀라 ‘엇!?’ 하는데, 회의에 참석한 다른 이가 거든다. “스피노자랑 니체하면 되겠네. 히말라야가 우리 중에 가장 니체적이잖아.” 아니, ‘내가 니체적이라는 건 또 뭐지’ 생각하는 사이, 거기 모인 사람들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어쩌구 저쩌구’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때 또 다른 이가 외쳤다. “어머, 히말라야 좋아하는 것 좀 봐, 쟤 저렇게 환한 표정 짓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엥, 내가?’ 그 날, 나의 2020년 플랜은 그렇게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다.

 


 

 

자유의지, 원인을 모르는 욕망

소위 ‘자유의지’에 의해서, 나는 좋은 학부모가 되기로 ‘자유롭게’ 결심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사람이 자유롭게 뭔가를 결심한다든가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좋은 학부모가 되겠다는 내 결심을 한번 잘 살펴보자. 이는 진짜 자유로운 결심인가? 십 수 년 간 좋은 학부모 되려던 관심이 ‘1도 없던’ 내가, 왜, 뜬금없이, 자유롭게 이런 결심을 한 걸까?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주변에서 다들 ‘공부공부’하는 바람에 스스로 압박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행여 나중에 엄마 때문에 공부 안했다는 원망을 들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까? 이런 무의식적인 압박감과 두려움은 과연 내가 자유롭게 느끼는 것들인가?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기의 바람을 의식은 하지만 왜 그런 바람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상태에 ‘자유의지’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고 설명한다. 생각해보면, 좋은 학부모가 되겠다고 결심한 내 상태가 정확히 그렇다. 내게 좋은 학부모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나 그동안에는 바라지 않던, 그런 바람이 왜 생겨났는지, 정확한 원인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좋은 학부모는 아무나 하나? 그동안 쌓아놓은 정보력이나 인맥과 같은 역사가 있어야하고, 애를 대학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체정명의 사명감도 조금 있어야 하고, 그런 일 속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적성 또한 내 안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좋은 학부모 되기란, 자유로운 결심이나 결단이 아니라, 이전의 원인들의 역사와 조건형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결과다. 이런 것을 스피노자는 ‘필연성’이라고 부른다. 아무 원인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결과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지금부터’ 좋은 학부모가 되겠다는 결심은, 원인 없이 결과를 보겠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던 것이다.

 

 

생동하지만 자유롭지는 않은, 필연성

만약 내가 ‘좋은 학부모’라는 목표 아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한다고 해보자. 계획이란 아무리 잘 세웠더라도, 가다보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늘 벌어진다. 또 하다보면 자기 목표 자체에 대해 회의감이나 의심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목표를 이루려면, 우발적인 사건들 때문에 흔들리거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감정들에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을 보통은 ‘자유의지’가 강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철저한 숙명론이며, 외부의 힘에 의해 완전히 강제된 상태일 가능성이 더 높다. 자기가 왜 그런 목표를 정해야만 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 강제된 목표에 복종하여, 자기 안에서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다른 다양한 잠재성들이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차단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때로 아주 열심히 살면서도, 강제된 힘에 복종해 수동적으로 살고 있을 수 있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께서는 강제 또는 외적 힘과 필연성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이 살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등의 사실은 강제된 결과가 아니지만 필연적인 일입니다.” , 스피노자 <<서간집>> <서신56>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필연성은, 각 사물이 자기의 고유한 에너지를 자기 본성에 내재한 원리에 따른 필연적인 방식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만물은 모두 그 안에 꿈틀거리며 생동하는 내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기회만 되면 그것을 세계 속에서 펼치려고 애쓴다. 자기 본성의 원리로 자기 변화를 만들어 내기에, 생명은 ‘자기 원인적’이다. 물론 ‘전적으로’ 자기 원인적인 것은 신 뿐-자연전체의 생명의 원리이자 그 발현인-이다. 그러나 각 사물 역시, 자기의 고유한 ‘부분’에서만큼은 자기원인적인 것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은 사물 바깥에 있는 단순한 메커니즘이 아니다. 필연성은 사물 속에서 생생하게 작용할 권능(vivante puissance d'agir)이다.” , 프랑수아 모로 <<스피노자>>

 

이것은 생명이 지닌 능동성이지만,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 콩 씨가 아무리 능동적이어도 팥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각 사물이 지닌 필연성의 원리는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각 사물이 자신의 에너지를 펼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주로 기쁨을 주는 것들-은 모두 다 다르고, 그게 무엇인지 잘 알수록 이 능동성의 힘은 커진다.

 

 

모든 우연은 필연이다

문제는 이 내적인 필연성과 그 필연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씨앗이 자기 안에 어떤 필연성이 있는지 알려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을 만나봐야 한다. 인간 안에는, 씨앗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잠재성이 있을 것이고, 훨씬 더 다양한 외부와 만날 수 있으며, 그 외부에 훨씬 더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다.

어떤 결과는 어떤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일 테지만, 원인과 결과의 쌍은 너무 다양하고 많다. 그러니 사물이 지닌 필연성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실험을 통해 발견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편이 현실적으로는 이치에 맞는다. 우연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손 쳐도 그것은 우리가 그 모든 필연적 과정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각자의 안에서 생겨나는 ‘쓸데없는’ 생각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건들은 그저 무시해야 할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덕목은 ‘관용’이다. 각자의 잠재성은 무한하고 그것을 발현시킬 수 있는 조건도 다양하기에, 각자는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다양성과 필연성은 저절로 그러할 뿐 어떤 의미나 목적은 없다. 그런데도 어떤 하나의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도록 욕망을 몰아가는 사회는, 자연스러운 다양성들이 발현되기 위한 실험을 제거하는 폭력적인 사회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필연성’을 이해하는 만큼, 서로에게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따라서 생명에 내재한 다양성의 필연성을 이해하려는 태도, 우발적인 사건들 속에서조차 필연성을 발견하려는 태도, 그런 삶의 태도야말로 지성적인 것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다.

 


방석을 만드는 뿔옹 & 히말라야



버릴 책을 고르는 마당에, 왜 ‘스피노자라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을까? 그 생각은 왜 다음날 뿔옹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까? 자기들 맘대로 떠드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왜 웃고 있었을까? 나도 모른다. ‘저절로’ 그리되었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뿔옹과 함께 스피노자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맨 날 자기들 맘대로 떠드는 친구들과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우연들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적인 이 모든 것들은 내 안에 있는 무엇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들의 상호작용의 긴 역사 속에서 튀어나온 필연일 것이다.

나는 전혀 ‘자유롭지 못하게’ 퇴근길인문학 튜터를 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유롭게’ 좋은 학부모나 효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처럼 가슴이 ‘깝깝’하지가 않다. ‘깝깝’하기는커녕, 빨리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싶어 안절부절이다. (심지어 뿔옹이 내 글이 재미없다고 계속 퇴짜를 놔도,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거기 매달려 또 다시 고치고 있다. -.-;;)

버리겠다고 분류했던 책들은 다시 책장에 고이 꽂혀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다시 책장에 꽂힌 반짝거리는 맑스 전집과 폴라니 책을 볼 때마다, 걱정은 좀 된다. 아, ‘그 인간’이 맑스와 폴라니 해야 한다고 또 들이대면 어쩌지? 그 때도 친구들이 내가 못 보는 내 얼굴을 살펴주겠지. 그나저나, 좋은 학부모는 어쩌나? 그것도 뭐 필연성에 따라, 될 만큼은 되지 않을까?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