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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예언가와 예술가

by 홍차영차 2020. 2. 27.

예언자와 예술가

: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4장 요약 정리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마이모니데스를 비판하지만, 스피노자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어떤 면에서 마이모니데스와 차이를 갖는지 파악하기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종교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는 분명 마이모니데스에 대한 충실한 독해와 비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우선 마이모니데스의 관점을 살펴보자. 그에게 철학자는 단순히 진리를 전달하는 자이다. 반면에 예언가는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하며 논증보다는 이야기 형식을 사용한다. 마이모니데스가 보기에 예언가는 철학자를 넘어선다. 예언가는 육체적인 건강과 도덕적 자질은 물론이고 지성적인 면모와 이를 생생한 표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생생한 표상이란 철학자가 놓칠 수 있는 실재들 사이의 연결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이론과 합리적 논증을 말하는 철학자와 달리 구체적인 현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예언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있어서 좀 더 실제적이다.


스피노자는 예언자가 분명 철학자들이 볼 수 없는 일들(실제적인 일들)을 본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성경에 쓰여있는 예언들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나오는 예언들은 지성이 아니라 표상들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들은 그의 출신 배경, 사회적 위치, 개인적 기질을 반영하는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산물일 뿐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예언의 능력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완전한 정신이 아니라 더욱 더 생생한 상상력이었다.” 한 마디로 지성이 성경의 예언에 기여한 부분은 없다는 것! 예언자는 “생생한vivid 표상”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매우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그는 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누리는 이성적인 덕과 참된 행복의 상태를 이를 수 없다. “예언가들은 지성의 숭고함과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경건함과 신실함으로 인해 칭찬과 명성”을 얻기 때문이다. 예언가들은 덕스러운 인물이었고, 이야기를 창조하는 재능이 있었으며, 그들은 훌륭한 윤리교사였다.

또한, 스피노자가 예언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예언자의 과도하게 강력한 표상이 지성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우리는 지성과 표상상을 모두 완전하게 획득할 수 있다. 하나를 발전시키면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는 악화된다. 그리고 예언이 전달되는 방식이 너무나 정서적이기에 다양하게 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철학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지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증명된 명제 속에서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정서의 힘을 믿지만 결코 정서만으로 흔들림 없는 정치를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P.S. 현재 철학자는 있지만 더 이상의 예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생생한 표상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

“생생한 표상”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마이모니데스와 스피노자가 묘사한 예언가는 근대의 예술가의 면모와 흡사하다. 똑같은 하늘을 보면서 ‘꿈틀 꿈틀거리는 노란 하늘’을 그린 고흐, 자신도 어떻게 이 곡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헨델, 부서질 것 같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조각 속에서 삶의 역동과 끈질김을 보여주는 쟈코메티 그리고 스스로 썼음에도 그 내용을 묻지 말라고 말하는 시인들! 이들 모두는 이전에 예언가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예술가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예전에 예언가의 조건으로 제시되었던 도덕적 자질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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