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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25장)

by 홍차영차 2016. 5. 26.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 <<자본론>>, 제7편 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keywords : 산업예비군, 부의 축적-빈곤의 축적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 및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한다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한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편 끝의 빈궁/노동의 고통/노예상태/무지/야만화/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 (p881)


지난 주에 우리는 드디어 자본주의를 개인 대 개인의 시점이 아니라 체제로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보니 자본주의가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노동력과 자본의 재생산! 이어서 <<자본론>> 25장에서는 그 제목대로 ‘자본주의 축적의 일반법칙’을 일려준다고 하니 뭔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알려주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5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다양한 ‘빈곤’과 ‘빈민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맑스는 왜 다양한 빈민층들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맑스의 밝은 눈은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생산수단을 잃어버린 ‘자유로운’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공장에 출퇴근을 해야하니 당연히 가족이 지내야 하는 집이 너무 먼 곳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공장 근처에 집을 구합니다. 그런데 다른 노동자들 역시 비슷한 처지이다 보니 집 값은 비싸지고, 비싼 집세를 내기 위해서 매일 매일의 초과노동을 마다할 수 없게 됩니다. 더욱 기가막힐 노릇은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임금을 빼앗아가는 ‘집’을 제공해주도 터무니 없는 집세를 받는 주인이 바로 공장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채석장 근처에 거주할 곳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니 자본가들은 채석장 근처에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노동자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리고서는 임금으로 주었던 화폐를 다시 수거해갑니다[각주:1].

 자본의 축적과 집중을 세분해서 맑스가 이야기해주었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이뤄낸 ‘부의 축적’은 노동자들의 ‘빈곤의 축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던 ‘특별한 수단’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이는 ‘다른 자본가보다 더 효과적으로 착취’했을 뿐이다라고 맑스는 이야기해줍니다.

그런데 앞서도 여러번 느꼈지만, 150년 전의 상황이 바로 지금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래서 맑스는 이를 ‘자본주의 축적의 절대적인 일반법칙’이라고 불렀을까요. ‘일거리’가 있는 서울로 다니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얻어야 하는 직장인들. 그 비싼 아파트의 거주 비용을 내기 위해서 매일 매일의 야근과 주말 수당을 ‘자발적으로’ 벌려고 하는 샐러리맨! 

정말 흥미로운 점은 과거의 자본가들이 광산 근처에 오두막집을 만들어 놓구 노동자들에게 세를 놓으면서 지불한 임금을 다시 빼앗아 갔던 바로 그 방법으로, 지금의 노동자들 역시 목숨을 걸고 일한 댓가로 받은 임금을 다시 자본가들이 지어놓은 아파트의 생산 비용으로 뜯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 후분양제를 보면, 노동자들은 생산현장에서 노동력을 팔고 다시 임금을 받아서 자본가에게 아파트를 지어줄 자본을 대 주고 있는 꼴입니다. 이중의 착취를 넘어서 삼중의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취업자들의 과도노동은 그 예비군을 증가시키고, 거꾸로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p868


산업예비군의 문제도 그렇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의 논리가 통용되고 있다. 직장 밖에는 일하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젊고, 씩씩하고, 시키는 일이라면 모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용감무쌍한 거대한 ‘산업예비군’의 존재! 그 존재 자체만으로 현역 노동자들을 압박감을 느끼고, 그들에게서 더 이상이 투쟁(임금)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현재 취업한 노동자들이 노동법에 규정된 주 40시간의 노동만 하면 취업의 문이 조금 더 열릴 수 있는 것 아닐까라. 하지만 현역 노동자들 역시 직장 밖의 ‘산업예비군’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과도노동에 전적으로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적이라는 것은 거대한 봉기가 아니라 일주일에 딱 ‘40시간’만 일하겠다는 태도일수 있다.




맑스는 산업예비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맬서스의 인구법칙을 중요하게 언급한다.[각주:2] 많은 사람들이 빈민들이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과도한 인구공급, 다시 말해서 빈민들이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살펴보면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가 좋으냐 나쁘냐와 상관 없이 노동자의 과잉공급을 항상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맑스는 아일랜드의 사례를 들고 있다. 아일랜드는 1841년부터 1861년까지 엄청난 대기근과 해외이주때문에 인구의 1/3이 감소하였다. 단 20년 만에. 하지만 이렇게 인구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아일랜드 노동자들은 항상 ‘과잉’ 상태였다. 잉여가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가 특별한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빈민은 부자의 보물광산”이라고 벨러즈(J. Bellers, 1696)가 말했던 것처럼, 부의 축적은 근면한 빈민의 축적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p880


다시 한번 기억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부의 생산’은 결국 노동자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자 비판인 <<자본론>>의 시작이 상품분석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이것이지 않을까. 잉여가치가 만들어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든, 어떤 논리로 변명을 하더라도 ‘노동자’라는 것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 1장을 꼼꼼히 다시 읽어봐야겠다.


2016. 5. 25

  1. 영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동안, 프랑스에서는 고댕이라는 사업가가 푸리에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사회주의공동체를 실험했다. 즉 그는 자산의 공장과 노동자들이 지낼 집,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와 유치원, 공원, 건강보험(?)을 다 함께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뤄냈다. 즉 푸리에게 꿈꿨던 팔랑스테르를 현실적으로 만든 파밀리스테르를 만들고 매우 오랜 기간동안 유지해 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회주의적 사상의 현실화에 화들짝 놀란 자본가들은 소위 ‘박애주의적’ 접근이라는 이유를 대고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황금사슬-매우 비싼 아파트(?)-를 선분양하기 시작했다. 즉 이런 집을 구입한 노동자들은 밤낮 할 것 없이 거의 죽을 때까지 20~30년을 집값을 벌기 위해 노동해야 했다. 현재 집을 사는데 이용하는 mortgage라는 이름은 이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데, mort는 죽음이고 gage는 도박/게임을 말한다. mortgage는 처음부터 ‘죽음의 도박게임’이었다. [본문으로]
  2. 맑스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이 그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론들을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표절이냐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리카도뿐만 아니라 맑스도 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이 이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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