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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잉여가치의 창출 방법(11~14장)

by 홍차영차 2016. 4. 22.

잉여가치율 높이기

- <<자본론>>, 11~14장 협업, 분업, 매뉴팩쳐 -


keywords :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 특별잉여가치, 부분노동자, 협업, 분업, 매뉴팩쳐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잉여가치를 증가시킬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맑스는 이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만약 노동력의 생산/유지에 필요한 시간이 6시간으로 일정하다면, 잉여가치율을 늘리는 방법은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1노동일을 12시간으로 한다면 잉여가치율은 (6/6)100%이고, 15시간이 된다면 (9/6)150%가 된다. 하지만 노동일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자본가의 욕망이 무한한 가치 증식을 원한다고 하더라고 하루 24시간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를 늘릴 수 있는 방법 역시 한계에 부딪힌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상대적 잉여가치 개념이 나온다.

하루 24시간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하더라도 잉여가치를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노동일에 대한 계급투쟁이 심화되면서 노동일은 늘어나기보다는 점점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자본의 욕망은 여기에서 포기하는 것인가. 노동일이 고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필요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생산과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가 내려간다면 잉여가치율을 높일 수 여지가 생긴다. 상품의 가치가 내려간다면 노동의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옷, 핸드폰과 같은 상품의 가격이 낮아진다면 직관적으로는 여유있는 생활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노동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가능한 조건인데, 상품이 낮아지면 노동자의 임금 역시 낮아진다. 그리고 상품의 가격을 낮추는 부분이 어떻게 잉여가치와 연결되는지는 혁신적 개별 자본가와 전체 자본가의 입장에서 살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10시간에 아마포를 10개 생산(시장가치=10/10h)할 수 있는데, 어떤 개별 자본가가 기술혁신을 통해서 10시간에 20개의 아마포를 생산(혁신적 자본가가 만든 상품 가치=10/20h)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 혁식적 자본가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식과는 별개로 잉여가치를 늘릴 수 있다. 즉 다른 자본가는 여전히 10시간에 10개의 아마포를 생산하므로, 혁신적 자본가는 시장평균 가격 1h으로 판매할 수 있다. 즉 그는 다른 자본가보다 1/2h의 추가적인 잉여가치를 독점할 수 있다. 다른 자본가가 혁신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지만 혁신적 자본가는 동일한 잉여노동시간에 더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특별잉여가치라 부른다.

하지만 혁신적 자본가와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 역시 망하지 않기 위해서 비슷한 기술혁신을 하게 되고 10시간에 20개의 아마포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마포를 생산하는 자본가뿐만 아니라 전체 자본가의 잉여가치율에 높이는데 기여하게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상품(아마포)의 가격이 낮아졌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자체가 줄어들게 된다. 즉 노동생산성productivity을 높이게 되면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더라도, 잉여가치율이 높아진다. 맑스는 이를 상대적 잉여가치이라고 부른다.


양적 증가는 질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사회적 필요노동이 불변이라면 노동시간을 늘릴수록 잉여가치가 높아진다. 그리고 자본가는 이를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느끼는 바이다. 그렇다면 노동생산성 혹은 노동강도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자본이 자본의 역할을 하려면 어느정도의 자본량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즉 數, 노동자의 수가 문제가 된다. 동시에 많은 노동자가 같은 장소에서 일할 수 있게 될 때 잉여가치율이 높아진다는 것. 이는 단순한 협업co-oper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노동력의 단순한 증가로 보이지만 양적 증가는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독립적 수공업자는 하루에 12개의 아마포를 생산하다. 만약 이런 수공업자를 100명 모아놓는다고 하면, 노동과정 자체에서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노동자의 양적인 수를 늘렸을 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질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다시말해 단순하게 노동자를 모아놓은 것이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혼자서는 꿈쩍 않던 커다란 배를 옮길수도 있으며, 생산재료와 생산수단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고, 공간의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노동자는 옆에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쟁심spirit이 생겨서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분명 노동력은 개인적으로 노동자에게 구매되었다. 하지만 함께 모여 있는 노동자는 개개인의 노동력 이외의 사회적 생산력을 추가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물론 자본가는 아무런 소리 없이 이 사회적 생산력을 독차지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매뉴팩쳐 - 지휘자의 등장

협업이 지속되다 보면, 노동과정 자체가 세분화되고 독립화된다. 즉 분업, 매뉴팩쳐의 전형적인 형태가 나타난다. 이제 아마포 만드는 일은 실을 공급하는 사람, 염색하는 사람, 말리는 사람, 중간의 운반자와 같이 세분화되어 단순한 일로 쪼개진다. 이렇게 분업이 되면 단순한 일의 반복이 이어지게 되고, 노동자는 특수화된 일에 숙련도가 점점 더 높아지게 된다. 부분 노동자! 10명의 독립된 수공업자를 단순하게 모아놓는 것보다 10개의 세분화된 일로 아마포를 만드는 노동과정을 나누게 되면 각각의 과정에 대한 숙련도가 독립된 수공업자보다 높아진다. 그리고 숙련자는 부분노동자로서 자신의 신체를 점점 더 구체적인 작업을 위한 자동적이고 일면화된 도구로 전환시킨다. 앞선 노동일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생명을 짜내서 이익을 얻는다고 했는데, 매뉴팩쳐의 부분노동자는 자신의 신체를 불구로 만들고 정신을 백치로 만들면서 잉여를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노동자들 사이에는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등급이 나누어진다.

협업에서 작업이 조금 세분화, 특수화 된 것이 매뉴팩쳐이다. 그렇다면 협업과 매뉴팩쳐의 분업에 차이는 없는 것인가? 협업이 단순히 노동자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매뉴팩쳐는 모인 노동자들의 유기적으로 엮을 필요가 있다. 즉 매뉴팩쳐의 개별 노동자들은 전체노동의 리듬에 맞추어 일할 수 있도록 감독할 지휘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분업과 매뉴팩쳐 내에서 분업이 비슷한 것이 아닌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분업, 즉 농업, 공업, 상업에서 나오는 모든 생산물은 그것 자체로 상품이다. 하지만 매뉴팩쳐 내의 분업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매뉴팩쳐에서 상품이 되는 것은 모든 부분노동자들의 공동생산물뿐이다.



학교 도서관의 모습 - 그런데, 위에 있는 공장노동자와 모습이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메모 - 공장과 학교

맑스는 13장 협업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본이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에 고용하고, 노동과정이 대규모로 수행되어 대량의 생산물을 공급하게 되는 그 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대량생산의 조건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근대의 학교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을 많은 노동자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같은 자본가의 지휘 밑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학교를 “특정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며, 의무적인 교육과정에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를 앞서 언급한 정의로 고쳐본다해도 거의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많은 청소년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종류의 학습을 받기 위해 교사의 지휘 밑에 공부하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대적 학교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복무하기 위한 노동자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많은 (대)학교들은 자본가의 입맛에 맞는 적합한 노동자를 생산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닌 듯하다.


2016.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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