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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점점 사라지는 노동의 흔적(23~24장)

by 홍차영차 2016. 5. 23.

점점 더 사라지는 노동(자)의 흔적

- <<자본론>>, 제7편 23-24장 -




keywords : 노동자, 진정한 지불자, 모든것의 생산자, 자본의 재생산, 노동력의 재생산, 빈곤의 재생산, 자본가의 기묘한 고행, 노동기금



모든 것을 생산하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어떤 사회적 생산과정도 그것을 연속된 전체로서,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으로 고찰할 때는, 재생산과정이다.” p769


이제까지 맑스는 노동자와 자본가를 개인 대 개인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뭔가 꺼림칙해 보였던 노동력과 임금의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에서 아무런 오점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자본론>> 제7편에 들어서, 자본을 ‘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하자마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정당하고 이익을 주는 것처럼 보였던 교환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가 드러난다.

추가된 잉여 가치는 노동력의 사용가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가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노동자의 노동력과 자본가의 화폐의 교환을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정상상태(steady state)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흐름으로 보면, 자본가가 지불하는 화폐는 모두 과거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일 뿐이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이 교환을 살펴보면 자본가가 투하한 ‘자본’은 과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노동자에 의해 착취된 잉여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이란 잉여가치의 자본화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 관점으로 노동의 생산과정을 보면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모든 가치는 노동자가 생산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노동력은 특이한 상품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노동력은 다른 상품과 달라 노동이 끝난 이후에 그 대가(상품값, 임금)를 지불받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소비하면서 자신에게 지불할 임금을 생산할 뿐 아니라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어 자본가의 생존까지 돕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변자본인 생산수단과 가변자본인 노동력 모두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부와 빈곤은 함께 재생산된다 - Sao Paulo, Brasil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력의 재생산일뿐 아니라 빈곤의 재생산이다.

자본을 물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볼 때,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력의 재생산과 빈곤의 재생산을 전제로 삼고 있다. 


“면직업 공장주 가운데 선발된 포터는 ‘기계’를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들은 둘 다 자본가의 것이지만, 하나는 그의 공장 안에 있고, 다른 하나는 일요일과 야간에는 공장 밖 오두막에서 거주한다. 하나는 죽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p783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과정에서 '소비'한다. 이 부분에서 노동자는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력의 소비는 매우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맑스는 이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자신이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데이트를 하며, 멋진 옷을 사는 것, 헬스를 하고 여행하는 하는 개인적 소비 역시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놀라우면서 흥분되는 부분인데, 자본의 재생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분명 '노동력의 재생산’이고, 노동자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바로 노동력 그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공장 안에서 노동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장 바깥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너무나 '생산적'인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계급 입장에서 보면 노동자 계급의 소비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두 생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단순히 '노동력의 생산'에만 머물지 않는다. 노동자는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다. 사회적 관점으로 보면 '빈곤'이란 자본주의 안에서 게으른 사람, 능력없는 사람이 처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매우 필수적인 구성요소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빈곤' 역시 사라질 수 도 있다는.

추가적으로 할렘가, 빈민촌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빈민촌'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꼬~옥 '빈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노동력, 빈곤)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지속적인 조건이 된다.


정리해 보면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가치의 생산자이자 지불자는 노동자이다. 하지만 정작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에 묻어있는 노동자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생산과정의 생산수단은 과거의 노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본가가 지불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고도화되고, 그 자본의 축적량이 거대해질수록 노동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생산수단에서 가변자본(노동력)의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지고, 그 능동성에서도 주도권은 노동자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 혹은 기계가 차지하게 되었다. 앞서 공장체제에서 보았듯이 노동자는 주체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시스템의 돌아가는 속도에 일하는 부품이 되어 버렸다.

노동가치설을 전제로 한다면 노동 없이 추가적인 가치의 생산은 불가능하다. 자본가들은 노동자 없는 생산을 꿈꾸기를 좋아하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자본가들은 생산의 현장에서 ‘노동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편을 택했다. 공장의 전자동화, 인공지능화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재생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한 사람의 노동자도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더라고 그 가치는 노동자가 생산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2016. 0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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