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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법의 '시초' 정신은 소유

by 홍차영차 2016. 6. 10.

의 ‘시초’ 정신은 소유

- <<자본론>>,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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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30일) 오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19살 청년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마음이 더 아팠던 것은 그의 가방 안에 담겨 있던 컵라면때문입니다. 일을 하느라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또한 매일 한끼를 사 먹는 것이 부담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름니다. 그러면서 원래 삶을 살아가는 게 이런 것은 아니지 않을가, 지금 대한민국이, 자본주의가 잘못돌아가고 있으니 그런거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자본론>> 1권을 마지막까지 읽고 나니 이런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랑게가 “법의 정신은 소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 시초부터 법-사회체제란 ‘자본’의 동지였으니까요.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가 한 끼 밥도 먹지 못하게 하는 지금의 자본주의, 이는 맑스가 밝혀낸 시초축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맑스는 1권의 마지막 8편에서 시초축적부터 근대 식민이론까지 노동자들이 투쟁을 ‘피와 불의 연대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잔혹함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본가들의 몰염치함과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놀랄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마지막 편을 읽으면서 맑스는 <<자본론>>을 읽는 사람들이 갖고 있을지도 모를 ‘자본’에 대한 ‘자본가’에 대한 일말의 희망, 한 톨의 가능성도 제거해버립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시초부터 자본은 폭력과 함께 탄생했고, 이를 지지해 준 것이 법과 국가였다고.’

인클로져를 통해서 자본이 모아졌지만, 자본의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일할 임금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자신의 생활수단을 빼앗긴 농부들은 결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임금노동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스템이었으니까요. 그들은 부랑자가 되거나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한 자본가들은 ‘거지 면허(a beggar’s license)’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국가가 발급한 거지면허는 힘이 없는,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발행되었고, 거지면허를 갖지 못한 건장한 사람은 채찍질로 노동현장으로 몰아갔습니다. 만약 “부랑죄로 두 번 체포되면 다시 태형을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세 번 체포되면 그는 중죄인으로 또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자본가들의 공동체, 화폐 공동체에 ‘적’으로 규정되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반대로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죽음의 공포’가 가해진 이후에야 우리들이 복종할 수 있는 규율discipline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짧게 따져도 200년 이상 이런 공포가 지속되었고, 그래야 가능했던 것이 지금의 임금노동자입니다.


지금은 최저임금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초기 노동자가 형성될 때에는 노동자의 최고임금의 법제화가 더 중요했습니다. 혹시라도 자본가가 더 많은 임금을 주려 해도, 법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더욱 놀라운 점은, 만약 최고임금을 초과해서 임금을 받게 되면 벌을 받게 되는데 돈을 준 자본가보다 임금을 받은 노동자가 더 가혹한 처벌을 받도록 법이 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시초축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임금을 ‘규제’하기 위해, 노동일을 연장하기 위해, 그리고 또 노동자 자신을 자본에 정상적인 정도로 종속시켜 두기 위해, 국가 권력(the power of the state)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시초축적의 하나의 본질적 측면이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본가들은 스스로가 자신이 하는 일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렇기에 자본가들은 법으로 “노동자들의 단결(결사)을 14세기로부터 1825년에 이르기까지 중죄로 취급”했습니다. 정말 처음부터였습니다.  스미스가 말했던 것처럼 “의회가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려고 시도할 때, 의회의 상담역은 언제나 고용주”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발견했기에 맑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일어나라!”고 외쳤던 것이 아닐까요. 힘의 투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자본의 결론은 사적 소유의 철폐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한 개인이 사회적 힘-화폐-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적 개인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더욱 더 줄기차게 실험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매번 공부를 마칠 때마다 essay를 쓰는데, 이는 프랑스어 essai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essai는 시도試圖하고, 시험試驗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essay게 새로운 시도, 시험이 되기를. 새로운 시도의 밑받침이 될 수 있기를.




2016.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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