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 1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마지막 하나까지도 정말 그러한 것이 맞는지 나 스스로 확인해 보라고, 우리의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야단주의자, 니체! 짜라투스트라가 되고자 했던 ‘위버멘쉬’가 이곳에서도 보이는 듯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현재의 삶을 현상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니체의 책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함께 공명하면서 삶을 주도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으로 다가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체는 저 깊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면서 깊은 곳으로 내려가 철학자들이 확실한 지반으로 삼고 있는 개념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내 딛는 곳은 도덕. 모든 권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은 우리에게 복종만을 허용한다. 피 끓는 열정과 의지를 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 마비시키고 심지어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철옹성, 도덕! 니체는 이 도덕이야 말로 우리가 철저히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라고 거듭해서 말한다. 그리고 근원에 대한 통찰과 함께 근원의 무의미성이 증대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니체는 이러한 도덕의 근원으로 관습과 풍습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결국 관습이란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명령한다는 이유로 복종해야 하는 좀 더 높은 권위일 뿐이라고 말한다. 풍습에 대한 감정은 사실 우리의 경험 자체가 아니라 풍습의 오래됨, 신성함, 자명함과 더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인류의 공동체들은 언제나 ‘풍습의 윤리’에서 비롯된 중압 속에서 살아 왔다.
하지만, 미치거나 미치게 보일 용기가 있어야만 기존의 습속을 부술 수 있다. 자유로운 사유와 개인적으로 형성된 삶의 영역을 걸어가려고 하는 아무리 작은 발걸음 하나라도 오래전부터 정신적/육체적 가책과 함께 싸워 얻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역사는 훗날 ‘선한 인간’이라고 불리게 되는 관습, 풍습을 새롭게 고쳐 쓴 ‘악한 인간’들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니체의 첫 번째 책, 아침놀의 1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느낌이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린 사사키와 니체의 계보학을 이어받았다는 푸코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으로 인해서 오리지널은 항상 초라하게 보일 때가 많은 법인데, 니체는 그렇지 않았다. 기대한 모습으로, 상상을 넘어서는 호통으로. 차근히 다음 권들을 읽어가면서 니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다.
2013.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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