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급진적인 생각이고 과격한 행동일까?
브라질의 민중들이 읽고 쓰는 공부를 통해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운 파울로 프레이리의 노력, 버스에서 백인들을 위해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며 앉아 있었던 로자 파크스의 행동, 80년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학교 수업보다는 운동 대열에서 화염병과 더 친했던 대학생의 행위들, 과연 이들의 모습은 행동은 급진적 이론이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지켜지지 않는 위협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과격한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그들에게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주권 없는 학교]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by 노암 촘스키 (아침이슬)
촘스키는 교육에 대한 사상적, 이론적 깊이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우리가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객관성을 바탕으로, 그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삶에 대한 포괄적 성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언어학자이어서 그런지 교육에 대한 본인의 새로운 주장과 시도는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의 정의를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흔히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할 때가 많다.) 진보와 보수는 무엇일까? 원래 학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좋은 교사란?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대신 이러한 기본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내가 상상하는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면들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 지식과 비판적 시각을 강조하기 위해서 촘스키는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있지만, 자국의 이익과 체제 유지를 위해서 각각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모습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에서 언급한 일관성 있는 잣대의 적용이라는 지식인의 모습과도 상반된다.
촘스키가 언급한 현실(fact)을 파악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세계적 현실이 나의 개인적 상황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밖에는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핍박하는지, 남미의 계속되는 분쟁 결과, 이집트에서 발생한 투쟁이 어떻게 나와 우리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화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방관자로밖에 남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몸에 생긴 아토피는 부모의 눈에 확실하게 보이고, 그로 인한 고통이 명확하게 전달되기 때문에 절박함을 가지고 그 고통을 치료하고자 부모들은 ‘과격한 행동’까지도 불사한다. 하지만, 교육, 체제, 세계관, 가치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이들과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지는 잘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의식적으로 현식을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들의 인과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렇게 상관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엮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서 볼 수 있도록 드러내 주는 것,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현실이 어떻게 나와 내 아이의 삶과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교육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2013.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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