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으로의 진격 - 1
1. ‘다름’을 부정하는 시대
내가 국민(초등)학교 입학할 당시를 되돌아 보면 동네의 부잣집 아이, 가난한 아이, 콧물을 흘리며 어수룩해 보이는 아이, 단정한 옷차림의 똑똑해 보이는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서로 다른’ 모습의 우리들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우리 동네에는 그 외의 ‘특별한’ 학교들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주변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모습을 보면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똑같은 브랜드의 아파트, 비슷한 평수, 비교적 동일한 경제적 수준의 부모들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옷가지 하나라도 다른 아이들에게 뒤쳐질까 몸서리 치면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려고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비슷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게 되는데, 우리들과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다른 모습에서 상호 배우고 자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꿈꿔 볼 수 있을까.
청소년, 직장인, 심지어 주부들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왕따 문화 역시 이런 ‘다름’을 용납할 수 없어하는 무리의 광기가 그 원인이 아닐까? 유행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같은 옷과 음식, 음악, 욕(언어)을 하는 것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르지 않음을 공공연히 선포해야만 그 무리 안에서 지낼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흡사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다름없이 느껴 진다. 겉으로 보이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하여서 한 무리 속에 살아가는 오리를 배척하고 등지는 모습은 바로 우리 시대에서 ‘다름’을 부정하는 문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동물의 왕국을 보게 되면, 덩치와 개체수로는 훨씬 많은 물소 떼들이 어린 물소새끼가 사자에게 잡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저 ‘사자’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가지고 도망가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전체 무리가 도와준다면 어린 새끼를 금방 구해낼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동물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보고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에 자못 자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바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 물소떼들 혹은 오리새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데카르트가 주창하고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랑하고 있는 ‘사유하는 인간의 모습’은 더 이상 이 시대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냉혹한 현실을 더 잘 알고 있기에, 밀림의 들소떼보다도 더 본능적으로 자신을 환경 속에 감추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다름’을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 ‘다른 삶’에 대한 인식
모든 부모들이 바라는 아이들의 장래, 혹은 우리들 개개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개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원하는 삶이 똑같을 수는 없을 테니 당연히 자라나는 과정과 배움도 남들과 다른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온 모습이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과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비슷한 나이, 똑같은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서 좀 더 많은 부와 효율적인 삶을 목표로 살아가도록 자본주의의 표준화된 인력으로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고, 이렇게 양산된 표준 인력들은 자본이 그어놓은 좌우의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우리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공교육의 체제 속에서 1등이 되고자 노력해 왔으며, 좋은 성적과 스펙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더 넓은 아파트와 차와 소유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사립학교, 대안학교, 홈스쿨링, 유학이라는 다른 형태를 택한다 하더라도 그 배움의 목표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른 삶’은 불가능한 것인가?
다른 교육이라는 주제로 이제까지 함께 책을 읽으면서 토론해왔던 에드워드 사이드, 파울로 프레이리, 마일스 호튼, 촘스키, 김영민은 자신들의 책을 통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왔음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그들의 태생이 특별하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시대적, 개인적 환경을 통해 그들이 ‘다른 삶’을 선택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런 ‘다른 삶’의 과정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책과 삶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나만의 배움을 통해서 머리가 아닌 몸을 통해 깨달을 수 있도록 체화 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살아온 것처럼 우리가 현재의 체제 속에서 변화를 위한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 역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결정될 것이 확실하다. 다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습관, 생각까지도 물질화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인해서, 과거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우리 현실의 삶은 더욱 더 팍팍해 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삶’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하면서 만들어 가는 능동적이며 유기적인 삶이다. 유기적 삶의 특성 때문에 어떻게 변해갈지 모른다는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의 삶이 ‘다른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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