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by 파울로 프레이리 & 마일스 호튼 (아침이슬)
이 책 안에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였지만 비슷한 경험과 사상 체계를 가지고, 상호 신뢰와 존경을 표시하며 20년 이상 교류해 온 파울로 프레이리와 마일스 호튼의 경험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감히 100년의 경험을 축약해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각자가 활동영역을 살펴보면 파울로 프레이리(1921~1997)는 남미 브라질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 내에서 대학 등을 중심으로 교육운동을 진행한 반면에, 마일스 호튼(1905~1991)은 미국에서 태어난 주로 공식적인 학교체제 바깥에서 독립적인 센터를 운영하면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실천 방식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으나, 호튼과 프레이리는 모두 민중의 억압된 모순을 해방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으로 교육을 선택하였고, 민중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동일한 사상적 체계를 갖게 되었다.
두 분 모두 맥락을 이해하면서 글을 읽어야 한다는 독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억압적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개인의 단점극복이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페다고지’나 ‘지식인의 표상’에서 언급한 중립성의 문제라든지 전문가의 역할과 같은 개념들을 두 분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대화를 통해서 좀 더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호튼은 교육의 중립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중립성은 현체재에 찬동한다는 것을 감추는 교묘한 말이라고 언급하면서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민중의 경험이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해법에만 의지하고 민중 스스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호튼과 프레이리 두분이 성과를 이루고 영향력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이론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호튼과 프레이리는 이를 바로 실천해내는 실행력과 그러한 실험 속에서 민중의 언어를 배우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제기해 보면, 호튼과 프레이리가 이렇게 민중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박탈당한 투표권, 인종 차별,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민중이라는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억압적 현실이 있었기에 좀 더 강력한 실행의 동기를 갖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현재 우리들의 현실을 살펴보면 예전처럼 지주라든지 혹은 독재자라는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억압자 혹은 억압적 현실이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변해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 세계의 매트릭스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더욱 촘촘하게 짜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호튼과 프레이리가 경험한 것처럼 현재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긴급한 일은 보이지 않는 억압의 매트릭스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형상화, 구체화 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다양한 문화활동을 통해서 이런 억압상황을 민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인식하게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사회 개혁의 동기를 부여하여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체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2013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억압적 상황 속에 있는 민중은 누구이며, 그 민중에 대면하고 있는 억압적 현실은 무엇일까?
100년의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함께 어제보다 자유로운 내일을 상상하고 만들어 가보고 싶다.
2013.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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