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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니체, 비판이란 무엇인가

by 홍차영차 2020. 12. 5.

도덕의 계보 - 순수이성비판을 다시 쓰다

: 들뢰즈 <니체와 철학> 3장









키워드 : 칸트의 비판, 순수이성비판, 도덕의 계보,  



니체는 <도덕의 계보>가 칸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의 다시 쓰기라고 말한다. 칸트는 분명 이성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지만, 이성을 심판관이자 피고로 놓는 모순에 빠진다. 니체가 보기에 칸트는 이성으로 이성을 비판한다고 했지만, ‘이성’을 사유의 유일한 토대이자 전제로 만들어버렸다. 칸트는 모든 사유의 근본에 이성을 놓으면서, 인간은 이성적으로 진리를 찾고, 진리를 찾을 수 있고, 진리를 찾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증명했다.

<니체와 철학> 1장에서 니체가 마주한 적은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영원회귀의 사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헤겔의 변증법은 뉴턴의 역학법칙의 사고 속에서 점점더 곤고해져갔고, 칸트에 이르러서는 절대 깨질 수 없을만한 증명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정말 이성적인 사유 이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인가? 진리 이외의 오류와 어리석음은 사유가 아닌 실수일 뿐인가.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것은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언제나 꿈틀거리는 살아있음의 욕망들이 아니던가.


니체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 이래로 우리의 질문은 하나였다.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의 질문. 하지만 이제 이것은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해 이것은 누구에 의해서 질문되어지고, 행해지는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란 질문은 항상 단 하나의 정답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이외의 것들은 삶 속에서 자리 잡을 수 없으며, 헤겔의 사고와 마찬가지로 ‘정당화시키야 하는 무엇’,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무엇’이 된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이성적 사고, 합리적/논리적 사고라는 하나의 사유 방식을 전제하고 있다. 칸트 이후에 이러한 사유 방식은 사유의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런 사유의 방식 이외에 다른 사유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동시에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질문을 바꾸었다는 것은 물음에 대한 새로운 탐구 방식을 요구한다. 징후학, 계보학, 유형학! 징후학이란 어떤 현상을 방법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처럼 해석해야 할 문제로 봐야함을 의미하고, 유형학이란 선과 악, 진리와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유형의 힘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계보학은 칸트의 비판에서 부족했던, 니체식 비판이 바로 ‘계보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현재를 바탕으로 그 기원을 따지는 방식이 아니라 그 현상이 이루어진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면서 그 사건, 사유를 둘러싼 힘들을 파악하는 것! 3가지 새로운 연구 방식은 <도덕의 계보>의 1논문에서 ‘선과 악’에 대해 묻고, 2논문에서 ‘양심과 죄의식’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3논문에서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파헤치는데 사용되었다.


1장에서 말한 것처럼, 니체는 삶에서 나타나는 반응적이고 저속한 힘들에서 적극적이며 고귀한 힘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삶 자체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긍정했던 디오뉘소스 철학처럼, 니체는 자신의 의지철학의 원리로 의욕=창조, 의지=기쁨을 들고 있다. 창조와 기쁨은 두그려 박고 뽑아내도록 되어 있는 망치의 양 끝으로 제시된다.


궁극적으로 니체는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제안한다. 삶은 어떤 면에서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 니체는 고귀한 거짓의 힘puissance du faux을 말한다. 삶을 긍정으로, 기쁨으로 만드는 예술로서의 ‘고귀한 거짓의 힘’이 필요하다. “사유를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삶”, “삶을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사유”를 사유해야 한다.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유란 결코 “어떤 능력의 자연적 발휘가 아니”며, 사유는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진리는 어떤 요소, 어떤 시간, 그리고 어떤 장소의 진리이다.” 우리는 이 진리에 어떤 힘들이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어떤 시간/어떤 장소/어떤 요소들 속에서 이 진리를 요구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위상학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니체는 진실로 “오늘날의 철학이 혜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자주 오지 않지만 항상 어디로인가 가고 있고, 그렇지만 꼭 오고야 마는 혜성인 철학자들만이 “복수주의를 사유의 기술, 비판적 기술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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