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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스피노자 개념 확대경 3) 관념과 감정

by 홍차영차 2020. 7. 1.

스피노자 개념 확대경 3) 관념과 감정







모든 관념은 상상이고, 잘려진 인식이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관념이다. 다시 말해, 관념은 ‘무엇’ 자체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표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물을 마시고, 글을 쓰고, 우정을 나누지만 컵과 물, 손과 연필, 사랑과 우정 그것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2부 정리 25, 27, 29) 왜냐하면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신체의 변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것의 관념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에는 대상의 본성과 동시에 신체의 본성이 함께 섞여 있어, 우리는 항상 잘려진 인식, 혼란스러운 관념을 갖게 된다.


나는 관념을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2부 정의 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2부 정리 13)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에 대한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본성도 함축해야 한다. (2부 정리 16)


좀더 현실적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관념이란 신체에 새겨진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라고 해서 시각visual에만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지들은 외부의 신체가 우리 신체에 남긴 흔적들traces들이고, 다른 한편에서 이미지들은 내 신체와 외부 물체가 만나 빚어진 효과에 대한 신체의 변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들의 한 상태를 표상하는 이미지들 혹은 변용들에 대한 관념이다. 만약 내가 30년 동안 만나지 못했음에도 내 신체에 그 친구들의 흔적/이미지가 남아 있다면, 그 친구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늙었는지에) 관계 없이 내 신체에 남아 있는 이미지들 혹은 변용들을 통해서 친구들의 ‘현존’을 긍정하게 된다.


인간 정신은 외부 물체의 실존이나 현존을 배제하는 변용(affectus)에 의해 변용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외부 물체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또는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으로 바라볼 것이다. (2부 정리 17)



조르주 쇠라

케테 콜비츠

- 20살 아무것도 모르고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무수히 많은 그림은 봤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쇠라와 콜비츠의 그림들. 이게 바로 내 신체에 새겨진 흔적들. 차이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무엇에 ‘대한’ 관념과 감정 

관념은 항상 ‘무엇’에 대한 관념이라고 했다. 우리는 항상 그것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상상하며 살아갈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념들과 함께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비슷해보이면서도 뭔가 다른 관념과 감정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관념이란 사유속성의 양태로서, 감정과 욕망의 토대가 되는 1차적 사유 양태이다. 관념은 ‘사물의 상태’를 표상하는데 반해, 감정은 상태들의 변이에 상응하는 ‘이행’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감정 없는 관념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에 대한 관념이 없는 감정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관념이 1차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이나 욕망 또는 마음의 정서(affectus animi)라는 이름 아래 지칭되는 모든 것과 같은 사유 양태들은, 동일한 개인 안에 사랑 받는 대상, 욕망되는 대상 등에 대한 관념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관념은 다른 어떤 사유 양태들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존재할 수 있다. (2부 공리 3)





정서affectio와 ‘이행’으로서의 정동affectus

스피노자는 분명 <에티카> 3부 정의 3에서 감정(정서)을 “신체의 변용들이자 변용들의 관념들”이라고 정의한다. 정서에 대한 정의에서 “변용들의 관념”은 앞서 ‘관념은 무엇에 대한 관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어떤 것을 표상하는 관념으로 비교적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신체의 변용들”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표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들뢰즈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서 감정(정서)를 좀 더 세분화하여 정서(관념)affectio과 정동affectus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들뢰즈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사유형식과 구별하여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사유형식(비-재현사유양식)으로 “신체의 변용”을 ‘정동(아펙투스, affectus)’이라고 부른다. 용어상에서 보면 들뢰즈는 <에티카>에 나오는 affectio와 affectus를 구분하여 전자를 ‘정서관념’으로 후자인 아펙투스를 ‘정동’이라고 부른다. 들뢰즈의 논리로 보면 정동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정동은 한자 그대로 움직임[], 이행이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변용들의 관념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3부 정의 3)


재현적 사유양식인 정서(관념)와 달리 정동affectus은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의 변용의 이행을 포함한다. 모든 관념이 정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아무런 정동을 일으키지 못하는 신체의 변용들이 있다. 이와 다르게 정동은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이행 그 자체, 신체 변용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이라고 다루는 대부분의 경우는 신체 변화의 종착지로서의 상태를 말하는 정서관념이 아니라 ‘신체의 변용의 이행’-정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왜 감정을 기쁨과 슬픔 두 가지로 분류하고, 두 감정 모두를 신체 상태의 이행, 신체 역량의 이행으로 전개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신이 커다란 변화들을 겪을 수 있고, 때로는 더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의 정서들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수동들[정념들]이라는 점을 보게 된다. (<에티카>, 3부 정리 1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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