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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호모-파시오날리스 일상기술 에티카 3) 너의 느낌을 말해다오!

by 홍차영차 2020. 7. 14.

스피노자 <에티카>를 읽다보면 뭘 알고 뭘 모르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쓰지 않으면, 정리하지 않으면 신체에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2020스피노자를 함께 공부하고 있는 히말라야와 뿔옹이 뭔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가면서 정념적 인간(호모-파시오날리스)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익혀봐요! ^^

호모-파시오날리스의 일상기술 에티카 3) 느낌, 정서, 정동

“너의 느낌을 말해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줄께!”

 

 

히말라야

 

 

 

 

 자기가 쓴 글을 들고 뿔옹을 만날 때 히말라야는 조마조마하다. 만약 뿔옹이 경쾌한 목소리로 “좋네!” 하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렇게 말해주는 뿔옹이 잘생겨보인다. 그러나 글을 읽는 내내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찡그리다가 “대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 날엔, 땅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고 자기 맘도 몰라주는 뿔옹이 정말 못생겨보인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은 대체로 이렇게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감정은 못 믿을 것, 잠시 후면 지나가 버리는 것 쯤으로 여긴다. 그나마 기쁨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지만, 슬픔과 미움은 마치 오래 지니고 있으면 안되는 ‘배설물’ 취급을 받는다. 사람들은 기분 나쁜 슬픔을 지워버리기 위해 시선을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 

 우리는 데카르트를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곧잘 믿는다. 그래서 못믿을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빨리 이성적인 생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생각으로 감정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느끼는 존재’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었다. 데카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러나 그에 반대해 생각이 결코 느낌보다 우월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했던 스피노자다.

 

 

존재는 언제나 ‘변화 중’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나를 둘러 싼 모든 것은 변하기에 늘 의심해야 하지만 생각하고 있는 자기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을 자연 전체로부터 뚝 떼어 놓는다. 실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생각하고 있는 인간 역시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 마찬가지로 매순간 변화하며 한시도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 

 가령,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호흡해야만 하는데, 그 때 우리 몸은 끝없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화학적 변화 과정을 통과한다. 물론, 이런 변화들은 너무 일상적이라 잘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안좋은 공기를 들이마시게 되었을 때나 지속적인 운동 후에 없던 근육이 생겨났을 때처럼,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계속되어 온 몸의 변화를 깨닫게 되는 때가 누구나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몸의 변화는, 그저 몸에서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늘 정신 속 생각들의 변화 즉 느낌을 동반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쾌와 불쾌, 기쁨과 슬픔 같은 느낌이 몸의 변화상태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히말라야가 호흡할 때 그 정신 속에는 호흡에 대한 관념이 동시에 생기고, 음식을 먹으면 정신 속에도 동시에 음식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그의 손이 글을 쓰면 그의 정신에는  글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뿔옹을 만나면 뿔옹에 대한 관념이 동시에 생긴다. 

 이렇게 정신 속에서 여러가지 관념들이 생겨나다가, 이전과 크게 뭔가 달라지면 감지되는 것이 느낌이다. 일상적인 몸의 변화를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매 순간 생겨나는 자질구레한 관념들 역시 정신에게는 잘 감지되지 않는다. 무의식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기 150년 전에, 스피노자는 이미 의식되지 않는 관념인 무의식에 대해 말했다. 물론 무의식으로 단단하고 고정된 ‘자아’를 만들어버리는 프로이트와는 정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정신이란 언제나 변화하는 몸과 함께 '변화 중’인 어떤 것이다.

 

 

신체 변용능력의 시그널 : 기쁨과 슬픔 

 우리 정신은 매순간 몸의 변화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관념들이 서로 뒤엉켜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시끄러운 장소다. 뿔옹에게 칭찬을 받은 히말라야를 보라. 그의 입은 헤 벌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지는데, 이 때 그의 정신 속은 유능감이 다른 관념들 앞에서 뽐내고 있다. 그러나 자기 글에 대해 ‘지적질’을 당하는 동안에는 입술이 굳어지고 돌아서는 발걸음도 무거워지는데, 이때 그의 정신 속에서는 무능감이 주연으로 등장 중인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들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 신체가 지닌 능력의 변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체가 변용(變容)하는 능력의 변화과정이자 상태다. 우리가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지 못하면 죽는 것처럼, 생명은 변화를 멈추면 죽는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더 많이 더 여러가지로 겪어낼 수 있을수록 즉, 변용능력이 큰 신체일수록 더 유능하고 볼 수 있다. 그저 숨쉬기만 하는 몸보다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몸이 더 능력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신체의 변용능력이 증가하는 모든 순간의 느낌들은 기쁨으로, 반대로 신체의 변용능력이 감소하는 모든 순간의 느낌들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자기 글을 퇴짜맞고 슬픈 히말라야가 ‘나는  슬프지 않다’고 아무리 고쳐 생각하려 해도, 그는 슬플 수밖에 없다. 신체의 능력없음이 그저 생각만으로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신체의 변용능력을 “느끼는 그대로 존재”한다.  느낌은 우리 신체 변용능력의 현 상태를 알려주는 아주 정확한 시그널이다.


 


 

느낌 속의 오해와 진실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즉각적으로 쉽게 하게되는 일은 상대방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과연 적절할까? 뿔옹의 칭찬과 비난에 좌지우지되는 히말라야의 느낌을 보라. 똑같은 인간인 뿔옹을 어느 날엔 호감으로 다른 날엔 비호감으로 평가하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느낌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을만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똑같은 대상에 대해 여러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느끼며, 같은 사람도 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느낌은 자기와 대상이 어떤 외부조건 속에서 마주치며 생겨나는 것이기에, 그 안에는 단지 대상에 대한 정보만 들어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의 느낌 속에는 뿔옹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쓴 글, 그날의 주변 상황, 자기의 몸 상태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 온 무의식적인 사고방식 등등이 더 많이 담겨있다. 그러니 자기 느낌을 상대방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면, 그건 정말 믿을만하지 못한 것이고 오류일 것이다. 

 그러면 없애려해도 없어지지 않는 내 느낌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느낌은 하나하나씩 따로 떼어서 쓰기보다는 그것들을 종합해서 쓸 때, 우리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된다. 뿔옹에게 글을 잘 썼다고 칭찬받고 좋아하는 히말라야를 보자. 그는 사실 꼭 뿔옹이 아니라, 다른 사람 누구라도 글 잘썼다고 칭찬해주면 좋아한다. 히말라야는 가끔 사진을 잘 찍는다는 칭찬도 듣지만, 그런 칭찬에는 글을 잘 썼다고 받는 칭찬만큼 크게 감응하지 않는다. 

 이렇듯 느낌을 종합적으로 보면, 느낌을 불러일으킨 상대가 아니라 실은 자기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드러난다. 또한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신체의 어떤 변용능력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신체 변용능력의 향상은 분명 기쁨이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종류의 변용 능력에서 비슷한 기쁨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제각기 더 기쁨을 느끼는 고유한 변용능력이 있고, 인간은 이런 느낌을 통해서만 자기자신에 대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 느낌으로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려하기보다는 상대를 평가하는데만 사용하는 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니체, <즐거운 학문>)다.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의 본성보다는 우리 신체의 상태를 더 많이 가리킨다. (<에티카>, 2부 정리16의 따름정리 )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 있어서만 자기자신을 지각한다. (<에티카>, 2부 정리23)

 

***

 

 

 느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스피노자는 일명 ‘기쁨의 철학자’라 불린다. 그가 이런 별명을 얻은 이유는, 느낌이란 신체상태와 뗄 수 없는 것이라서 정신의 생각만으로는 진정한 기쁨에 이르지 못함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슬프다면 신체의 변용능력이 무력한 것이기에 그런 신체상태 자체를 바꿔야 한다.

 글을 퇴짜맞고 슬픈 히말라야는 슬픔을 떨치기 위해 즐거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음악을 듣거나 맥주를 마시고,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와 수다를 떨고 쇼핑을 하고... 그렇게 그는 잠시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글쓰기에 대한 신체 변용능력이 향상되지 않는 한, 똑같은 슬픔은 되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자기 신체의 변용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부와 관계를 맺을 때마다 자기 안에서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느낌을 주시하며, 그것을 통해 자기 신체 상태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체의 어떤 능력이 커질 때 나는 진정으로 기뻐하는 존재인가?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내 신체와 주변상황을 어떻게 재배치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답해보려는 시도야말로 더이상 외부의 칭찬과 비난에 동요하지 않는 능동적 기쁨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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