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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의식(을 가진 인간)의 딜레마

by 홍차영차 2020. 6. 4.

의식(을 가진 인간)의 딜레마

: 니체, <즐거운 학문> 中에서





비웃지 말고, 탄식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고, 인식하라! (…) 하지만 이러한 인식한다는 것이 앞의 세 가지가 한꺼번에 느껴지는 형식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인식은 비웃고, 한탄하고, 저주하고자 하는 서로 상이하고 대립되는 충동들로부터 나온 결과가 아닐까? 인식이 가능해지기 전에 우선 이 각각의 충동들이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그것의 일면적인 견해를 내놓았음에 틀림없다. (니체, <즐거운 학문>, 인식이란 무엇인가p.301)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생각한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깊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주변의 동물들 - 강아지 고양이, 닭, 돼지, 소 - 들과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점으로 ‘생각의 능력’을 떠올린다. 유사한 것에서 동일한 것(p.188)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좀 더 복잡한 논리들을 추론해 내는 능력! 바로 이런 능력으로 우리는 100층이 넘는 고층 빌딩도 짓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지구 밖으로 나가서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자신을 다른 것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인식의 능력에 대한 과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삶이란 논증이 아니라는 것, 비웃고 탄식하고 저주하려는 충동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잊어버린 것 같다. 말과 행동, 인식(생각)과 행동의 일치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는 문제도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덕을 추구하는 최고의 수단으로서 인식(p.199)

말이 ‘낱말’로 바뀌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록의 역사 - 이야기의 역사가 아니라 - 가  나타났던 것처럼, 문자의 탄생과 함께 우리는 집단으로부터 분리되는 ‘자아’로서의 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생각들, 사물들과 동물들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은 기억들의 집합, 표상의 집합으로서 정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가능하다. 문자가 발생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저장된 생각들과 다른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배제하거나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는 ‘말’이 낱말로 바뀔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가는 이른바 축자 전통에서만 역사학자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낱말을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곳에서만 역사가가 이야기꾼을 대체할 수 있다. 역사학자의 집은 글이라는 섬에 자리 잡고 있다. …… 이 섬의 해변을 벗어나면 기억은 낱말이 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p.20>


인식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일리아스>에 아킬레우스처럼 순간적인 분노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적어졌고,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식이 덕을 위한 수단이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또한 문자를 갖게 되면서 부차적으로 갖게 된 의식은 우리에게 또 다른 숙제를 내주었다.



거짓말이 가능한 세상

의식을 가진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내면성은 인간이 가진 독특성이자 어려움이다. 문자를 배치하는 기술이 발달(문장, 문단, 장, 절, 색인 등등)함에 따라 우리의 내면성 역시 더욱 더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저장할 수 있으며, 또한 쉽게 지울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의식이 점점 더 발달하면서(?) 의식에서 파생되는 속마음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기 어려워졌다. 속마음을 가진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순간적인 화로 인해서 관계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방식에서 조금 뒤에 이야기를 하자고 하거나 사회적인 체면으로 폭력적인 행동이 제지당하는 것은 아주 큰 장점이 되지 않을까? 맞다. 하지만 속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인간 사회에서 거짓말이 가능한 세계, 거짓말이 일상이 된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점점 상대방의 의도와 진심을 따지게 되고, 이 사람이 말로 약속한 것을 잘 지킬 것인지 매순간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고 있다. 점점 더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말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무능력해지고 있다.



질병이 된 의식

거짓말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체와 사유의 평행론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신체와 사유가 하나임을 알고 있다. 생각으로는 분명히 용서를 했지만, 신체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코 해결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 지랄 총량의 법칙! 신체와 정신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건 터질 수밖에 없다. 내면성의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표상, 관념들의 집합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의 신체 그리고 타자의 신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내가 외부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것은 나의 신체와 그 물체와의 물리적인 부딪힘으로 가능하다. 갖난 아기가 외부와의 어떤 접속도 없다면 그 아이는 어떤 괌념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만져보고 냄새맡고 바라보고 먹어보면서 나는 그 물체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형성한다. 다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 물체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우리 신체를 통해서 타자를, 스스로를 파악해간다. 즉 우리가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에서 하나의 필터를 통과해서 파악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된 모든 것은 평범하고, 희미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이며, 기호, 무리의 표식이 된다. — 의식된 모든 것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가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의식의 증가는 위험한 것이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심지어 의식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니체, <즐거운 학문>, “종의 수호신”에 대하여p.339)


이런 점에서 ‘의식은 하나의 질병’이라는 니체의 말은 심장에 와서 꽂힌다. 니체는 질병을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통증에 “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렇게 부른다. 즉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지만 함께 가야할 친구 같은 존재로서의 질병! 의식을 갖게 된 인간이 ‘의식(자아)’에 대해 바라봐야 하는 관점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질병과 함께 살아가지만 결코 질병이 나를 압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태도, 그렇다고 그 질병을 없애겠다고 자신의 존재까지도 위협하도록 하지는 않는 것! (<개는 훌륭하다>를 열심히 봐야한다. ^^)


<즐거운 학문>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우리는 의식의 딜레마를 깰 수 있는가’에 대해 답해주는 것 같다. 학문이란 합리성, 논리, 인식의 토대 위에 모래성을 쌓는 것이므로, 그 성이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해저는 안 된다. 반복해서 말했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논리는 비논리적이고 부당한 충동들에서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즐겁지 않은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 자신을 망가트리는 질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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