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지혜 - 비판, 고통, 죽음, 비극 그리고 충동
: <즐거운 학문> 4부
비판을 위하여 - 과거에 진리로서 혹은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서 그대가 사랑했던 것이 이제 오류로 나타나면 그대는 그것을 배척하고는 그대의 이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그 당시에 - 그대는 항상 다른 사람이다 - 저 오류는 아마도 그대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당시까지 보아서는 안 되었던 많은 것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피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대의 이성이 아니라, 그대의 새로운 삶이 당시의 견해를 죽여버린 것이다. 그대에게는 더 이상 그 견해가 필요하지 않다. …… 우리가 비판을 행할 때 그것은 자의적이거나 비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적어도 살아 있는 충동의 힘이 우리 안에 존재하여 껍질을 벗겨낸다는 증거일 때가 매우 자주 있다. 우리는 부정한다. 우리는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을 긍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283)
온갖 고통을 제거하거나 줄이는 것이 삶의 목표인 듯 하다.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불안함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고통과 불안을 없애기 위해 돈을 벌고, 운동을 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는 것 같다. 하지만 니체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고통도 쾌락만큼이나 많은 지혜를 지니고 있다”(290)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 있다. 잊고 살아온지 너무 오래 되었기에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마조히스트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고통을 가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회피하지 말자는 것이다. 고통을 견디는 것이 최소한의 것이라면, “커다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내심의 곤혹과 불안에 빠져들지 않는 것”(294)은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것, 위대함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가 고통과 불안이라고 두려워하는 것들은 너무나 ‘과장되어’ 왔다. 현세의 권력은 세상 어디서나 이러한 고통과 공포를 과장하는 방식을 만들어왔다. 이로부터 자발적 예속이 출발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진지해지는 것’이고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고 아무런 생각의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즐거운 학문”에 대한 이 진지한 야수의 편견이다.”(296)
“비웃지 말고, 탄식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고, 인식하라”고 말했지만, 이러한 인식을 생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충동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315)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과 행위에 ‘최대의 중량’으로 부딪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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