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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되기devenir’의 실제적 기술에 관하여

by 홍차영차 2019. 9. 27.

‘되기devenir’의 실제적 기술에 관하여

: <천개의 고원>, 10고원 되기




남성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되기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남성이 유달리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의 다수성은 남성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 아이, 그리고 동물, 식물, 분자는 소수파이다. 아마도 남성-기준과 관련한 여성의 특별한 위치가 소수파 그 자체인 모든 생성들이 여성-되기를 통과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천개의 고원>, 551쪽)



‘되기’란 프랑스어 devenir로 ‘~이 되다’라는 것인데, 들뢰즈/가타리의 ‘되기’에 ‘남성-되기’란 없다. 그렇다면, ‘되기’가 그냥 아무 것이나 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왜 남성-되기는 없을까? 들뢰즈/가타리에게 ‘되기’는 창조이자 생성이고,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생성은 결코 딱딱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깊고 강하게 응고된 상태, 기득권이라고 불리는 견고한 권력에서는 어떤 것도 생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딱딱해진 상태에서 다른 것으로의 ‘되기’란 불가능하다. 되기가 되려면 우선 그 딱딱한 것을 허물어뜨리고 해체해야한다. 액체가 되고 기체로 퍼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

리좀, 얼굴성, 추상 기계, 기관 없는 신체, 고른판, 그리고 되기. 명쾌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천 개의 고원>을 읽다보면 이런 멋진 말과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해했는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전염됨을 느낀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들려주는 소설보다 매혹적인 이런 말들의 실천성을 고민하다보면 그가 하는 이야기들이 실현가능한 것인지,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막연할 때가 많다. 여기서는 들/가의 이야기를 토대로 ‘되기’ 사용설명서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론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어찌되었든 ‘되기’는 분명히 실재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 떼, 패거리를 구성하라

되기의 중심 영역에는 동물-되기가 있다. 그런데 동물-되기란 쥐처럼 행동하거나, 말의 습성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되기가 실재적이라고 말하지만, 내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쥐,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자칫 이러한 모방, 흉내는 창조적 역행이 아닌 퇴행이 될 수 있다. 마치 <23 아이덴티티>의 주인공이 자신의 마지막 자아를 자신의 탈출구로 여기면서 24번째 아이데티티를 기다리는데, 그 새로운 자아는 벌레처럼 벽을 기어다니고 총을 맞아도 죽지 않을 만큼의 강력한 외피와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생성했다기보다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끝났던 것처럼.

동물-되기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동물은 모두 무리, 떼, 패거리라는 것이다. 동물-되기를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을 무리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동물도 그 자신을 다른 개체들과 떨어진 개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토끼가 굴을 나올 때마다 귀를 쫑긋하고, 미어캣은 움직일때마다 고개를 쳐들면서 주변을 기웃거린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그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거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미어캣은 풀과 사슴, 호랑이, 늑대, 하이에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한다. 그의 행동 하나 하나는 자신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미어캣떼들 전체 중 하나로서 작동하고, 또한 사슴과 늑대와의 관계 속에서 행동할 뿐이다.

무리가 된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 배치된다. 내가 말할 때 나는 항상 가족의 일원으로, 문탁의 일원으로, 남성의 일원으로 말할 수밖에 없고, 나를 대할 때 사람들은 나를 이러한 무리, 떼, 패거리의 일원을 대할 수밖에 없다. 결코 어떤 사람, 사물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동물-되기가 되기의 중심 영역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되기가 무리, 떼, 패거리라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무리 속에서 다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무리를 구성하라는 이야기도 된다. 단독자로서 구성되는 ‘되기’는 어디에도 없다. 되기는 분명 자기 자신의 생산이지만, 이러한 되기가 가능한 것은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어떠한 공동체와의 관계성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되기는 불가능하다. 발견해야 하고, 형성해야 한다.


열려 있지만 문턱은 존재한다

무리, 떼, 패거리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동물-되기' "이렇게 해!"라는 명령이 아니라 전염의 방식으로 이루진다. 아니 그렇게 이뤄질수밖에 없다. 동물-되기란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흡협귀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듯 감응, 전염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들뢰즈는 "무리에 매혹되지 않는다면"이란 말을 쓰는 것 같다. 이들 사이에 위계란 없고, 고정된 위치도 없다. 무리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배치만 있을 뿐이다. 자신을 무리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리 속에 놓여진 배치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감응, 전염 모두 매우 신체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이자anomal와의 결연 역시 무리의 중요한 특징이다. 하나의 무리를 특징짓는 것은 중앙의 규칙이나 권력이 아니라 경계에 서 있는 자다. 그 경계에 서 있는 육손이, 마법사, 추방당한 추장, 괴물, 악마…. 백인들을 백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경계자 때문이고, 문탁네트워크의 공동체성은 매일매일 문탁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탁회원인지 아닌지 고민되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그 경계가 만들어진다. 들뢰즈의 언어로 말하자면 공동체란 괴물, 악마와 같은 기괴한 자를 통해서 말들어진다.


사이에서 존재하기

‘되기’는 무리이고, 전염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되기 앞에 구체적인 이름이 따른다. 동물-되기, 여성-되기, 아이-되기, 식물-되기, 광물-되기, 분자 되기. 모방도, 흉내도, 동일성도 아니라면 이러한 구체적인 이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되기란 응고된 것에서 벗어나 액체가 되고 분자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 다른 것으로의 생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성은 항시 그 사이에서 존재한다. 특이자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자. 공동체를, 되기를 구성하는 것은 중앙이 아니라 경계자이고 특이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개체도 종도 아니라면 이 특이자란 무엇인가?” 동물도 사람도 사물도 아닌 존재들은 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동물-되기란 인간과 동물 그 사이의 존재이고, 여성-되기란 그램분자적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이며, 분자-되기란 사물과 완전히 사라지는 분자 그 사이의 존재라고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되기는 소수자-되기이고, 지금과 다른 것으로의 이행이 된다.


즉,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 …… 생성은 누군가가 가진 형식들, 누군가가 속해 있는 주체,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들, 또 누군가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들에서 시작해서 입자들을 추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입자들 사이에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을, 누군가가 지금 되려고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우며 그것들을 통해 누군가가 생성하는 그런 관계들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생성은 욕망의 과정이다. (517쪽)


들뢰즈는 ‘되기’의 시작을 ‘동물-되기’부터 시작되었지만, 모든 되기는 “이미 분자적이다.” 여기서 ‘분자적’이라는 것은 떨림이고, 흔들림이며, 응고된 현재상태에서의 벗어날 잠재적 가능성을 말한다. 모든 방향으로의 잠재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자-되기는 모든 되기에 선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액체’로 만들어서 ‘세상 모든 사람처럼’ 되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시 이웃하는 항들이 되며, 그 이웃하는 항들간의 배치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박자 음악

여성의 여성-되기란 무엇인가? 여성-되기란 소녀에서 그램분자적(규정된) 여성으로 성장하거나 진화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여성-되기란 지금 규정된 여성의 모습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성의 여성-되기가 가능하려면, 흑인의 흑인-되기가 가능하려면 우선 현재의 모습을 허물어야 하고 분자적인 존재, 분자적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배치 속에서만 결정되는 존재,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존재, 하지만 분명하게 실존하고 있는 존재. 하나의 정체성을 전제하는 것에서 ‘되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없고, 다만 운동과 정지, 속도만이 있을 뿐이다. 순간 순간 나는 주위의 사물들과 그 리듬을 맞춰서 특이점singular을 구성할 뿐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주체성과 실체성에 근거한 개체화와 다른 ‘이것임’에 의한 개체화로 말한다. 주체성이 없는 개체화란 어떻게 가능할까? 어느 날, 어느 계절, 어느 해, 어느 삶 또한 어느 기후, 어느 바람, 어느 안개, 떼, 무리 등의 개체화! 무박자non-tempo 음악이 바로 이러한 개체화를 조금 더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박자 없는 음악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형식적 기능적 음악의 “박동하는 시간”이 있고, 속도나 역학적 차이만을 가진 유동하는 음악의 “박동하지 않는 시간”이 있다.” 하나의 노래, 음악을 쓰려면 오선지에 마디를 나누고 선율을 쓴다. 박자없는 음악은? 마디를 나누지 않고 선율과 화음을 써 내려간다고 생각해보자. 이렇게 되면 형식적인 면에서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마지막인지 알 수 없으며, 내용 면에서도 무엇이 주제이고 무엇이 곁가지인지 알 수 없다.

무박자 음악이라는 것은 측정의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불확정적 시간인 아이온의 시간으로 진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오직 그 순간만 존재하며, 매 순간 전과 후의 배치 속에서 집중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형성할 뿐이다. 무박자 음악에 정형화된 해석이 있을 수 없으며, 연주되는 매 순간마다 달라지고, 모든 박자가 모든 선율이 주인공이 되는 그런 음악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것이 ‘이것임’의 개체화가 아닐까.


들뢰즈/가타리의 되기는 실은 얼굴성 해체하기이며, 기관 없는 신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고른판 위에 서기와 다르지 않다. 들/가는 여기에서 다양한 되기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설명해주는 듯 하다.



2019.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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