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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23 아이덴티티를 넘어 얼굴 해체하기

by 홍차영차 2019. 7. 12.

23 아이덴티티[각주:1]를 넘어 얼굴 해체하기

: <천의 고원>, 7고원 얼굴성








경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의 주권적인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얼굴성의 특징과 이 특징 위에서 갇히고 그것을 다시 붙잡고 그것의 도주선을 봉쇄하고 그것을 다시 조직화하는 얼굴 그 자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싸움이다. (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357쪽)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쉬는 시간을 넘겨서까지 놀다가 걸린 친구들이 있었다. 회초리 한 대쯤으로 끝날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데, 친구 중 하나가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실실’ 웃었던 것 같다. 간단하게 꿀밤이나 회초리 한 대로 끝났어야 할 일이 ‘사건’으로 바뀌었다. “웃어?”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은 친구에게 다가갔고, 회초리가 아니라 손바닥으로 그 아이의 뺨을 몇 번이고 때렸다. 교실 중간에서부터 맞던 친구는 점점 더 밀리다가 책상에 걸려 넘어졌다. 친구가 넘어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돌아서서 한 숨을 쉬고 수학 수업을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몇몇의 친구들은 어떤 얼굴을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했고, 바로 그때 미세한 경련이 얼굴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친구가 웃었던 것이 그 선생님을 무시해서인지 아니면 갑자기 불어온 봄바람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혹은 선생님 뒤에 있던 친구가 자신을 놀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 역시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혼나는 순간에 보여줘야 하는 (엄숙히 반성하는) 얼굴을 만들지 못했다. 얼굴, 즉 표정이란 결국 그 사람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모든 비언어적인 것들, 모든 잉여들이 얼굴을 통해서 그 선생님에게 분명하게 해석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그 얼굴을 보면서 갑자기 정념에 빠져서 폭력을 휘둘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또한 자신의 매타작을 학교와 교사라는 (의미생성) 체제에 대한 도전에 대한 정당한 처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시간과 공간, 분위기 속에서 있어야 할 때, 경련을 일으킨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했듯이, 경련이란 조직화된 얼굴과 그것에서 도주하려는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얼굴, 하나의 정체성


의미생성의 중심 …… 우리는 이 표현의 실체에 얼굴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언어는 항상 얼굴성의 특질들을 동반한다. 또 얼굴은 잉여들의 집합을 결정화하며, 기표작용적 기호들을 방출하고 수신하고, 풀어주고 재포획한다.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 몸이다. 얼굴은 모든 탈영토화된 기호들이 달라붙는 의미생성의 중심몸체로서, 그 기호들의 탈영토화의 한계를 표시해준다. 목소리는 바로 얼굴로부터 나온다. (223쪽)


하나의 얼굴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얼굴은 머리에 달려 있는 눈, 코, 입으로 기능하는 몸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머리가 얼굴이 되는 것은 보는 눈, 숨 쉬는 코, 먹는 입이라는 기관(기능)에서 탈피하여 둥그런 ‘흰 벽’ 위에 이런 저런 모습으로 ‘검은 구멍’으로 나타날 때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얼굴은 머리 혹은 몸체의 일부가 아니라 ‘얼굴’이 된다.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탈기표화된 방식으로 사물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말이고, 우리는 눈치를 보면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처럼 얼굴로 말하게 되었다. “얼굴은 정치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얼굴을 갖지 않은 머리”를 가졌던 원시 사회와 달리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머리가 아닌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언어를 갖게 되었다는 말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들뢰즈/가타리 역시 얼굴성은 의미생성과 주체화가 겹치는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즉 기호체제가 없다면 얼굴성의 기계도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호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언어이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알파벳과 같은 문자의 탄생과 관련하여 작동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얼굴이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했는데, 문자가 없었던 구술 시대에서는 뚜렷한 자아(정체성)가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사물과 사유들을 고정시켜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자가 없었다면 공동체 집단의 의식과 분리된 개인의 정체성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낱말이 있어야 소리로 떠돌던 사물들을 고정시킬 수 있고, 이렇게 고정된 낱말들을 개인들이 머릿 속에 저장(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원시 사회에서는 “얼굴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문자가 없던 구술 시대에서 사유는 있는 그대로 표현되었으며, 개인의 사유란 모두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다. 구술 시대에 사유는 누구의 머릿 속이나 마음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흘러다니는 것이다.[각주:2] 이런 면에서 “원시 사회의 기호계는 기표작용적이거나 주체적이지 않고, 아주 다양한 표현의 형식들과 실체들을 이용하며, 본질적으로 집단적이고 다성적이고 몸체적이다.”(336쪽)

문자시대가 되면서 자아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언어이든지 수학이든지간에 어떤 기호체계도 홀로 형성되지 않는다. 기호체계는 항상 혼합되어 있다. 얼굴성이라는 표현의 실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기표적 기호체제는 항상 그것에서 얼굴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주체화를 형성한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주체화를 이루면서 기존의 얼굴에서 탈영토화를 하더라고 우리는 결국 또 다른 기호체계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훈육적이고 규율적인 매일 매일 다녀야 하는 학교에 대항하는 대안학교의 시도 역시 ‘자연 중심’의 교육 혹은 ‘자유주의’ 교육이라는 공교육과 다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주체화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학교가 지속되려면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기표적 기호체제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대로 얼굴성 기계는 그 자체로 먹는 입, 보는 눈과 같은 내용의 형식에서 그 내용(기능)과 전혀 관계 없는 표현의 형식으로의 절대적 탈영토화이긴 하지만, 고른판을 향한 절대적 탈영토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얼굴성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고른판을 향한 절대적 탈영토화 혹은 기관 없는 몸체를 형성할 수 없다.




하나의 정체성과 23개의 아이덴티티


얼굴을 해체하기,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기의 위험이 있다. 분열증 환자가 얼굴, 자기 자신의 얼굴과 타인들의 얼굴의 의미를, 풍경의 의미, 언어와 그것의 지배적인 기표작용들의 의미를 동시에 상실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일까? 그것은 얼굴이 강력한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직사각형이나 동그라미 안에 특징들 전체, 포섭해서 의미생성과 주체화에 이용할 얼굴성의 특징들을 취한다고 얘기될 수 있다. (357쪽)


그렇다면 얼굴성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다중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뜻일까?

데이빗 핀처의 <Fight Club>(1999)에는 두 명의 남자가 나온다. 일상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잭’과 매력적이면서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기억을 따라가보면, 영화를 보는 초반에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지도 또한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잭에게 연민과 동정을, 영화 마지막으로 가면서는 현재의 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거침없고 폭력적인 행동을 수행한 잭에게 시원함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결말 부분에도 잭과 테일러가 사실은 한 사람이라는 것에서 놀라면서도, 항상 현재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도주선이 가능할까 막막했던 것 같다. 잭도 아니고 테일러도 아닌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얼굴을 갖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다중 인격은 ‘장애’로 규정된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사람은 비정상적이며, 위험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을 바라보면 우리는 결코 하나의 자아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들뢰즈/가타리 역시 가면을 통해서 이런 분열된 자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용납하는 자아 분열이 있다. 규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다른 가면을 쓰는 것! 회사에서는 오로지 회사의 이익만을 신경쓰는 냉혹한 프로 회사원,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항상 자상한 아빠, 아내에게는 언제나 매력적인 남편, 미래를 위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성실한 학생.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행동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프로 회사원의 정체성을 가지고 회사, 가족, 친구 사이를 관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자상한 아빠의 정체성만으로 관계를 구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사는 것도, 23개의 정체성들을 가지고 사는 것도 답은 아닌 것 같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에서 주인공 케빈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정체성을 기다리면서, 24번째 정체성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에서 24번째 ‘나’는 ‘비스트’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비스트는  인간을 넘어서는 힘과 용기, 육체적 능력을 갖고 자신을 구원하려고 한다. 영화에서는 케빈은 ‘비스트-되기’를 통해서 정말 외적인 육체가 변하고, 힘이 세졌으며, 몇 발의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케빈의 ‘비스트-되기’는 얼굴 너머에 있는 완전히 다른 비인간성이라기보다는, ‘원시적인 머리’로의 퇴행으로 보여진다.



인간적인 머리와 비인간적인 얼굴


“원시인”들은 더 인간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정신적인 머리를 지닐 수 있다. 그들은 얼굴이 없고 얼굴을 가질 필요가 없다. …… 얼굴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모든 보편적인 것의 얼굴이다. 수퍼스타 예수. 그는 온몸의 얼굴화를 발명하고 그것을 도처에 전달한다. (337~338쪽)


얼굴성 추상 기계가 기능적 눈과 입과 코에서 탈피하여 표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얼굴성 기계가 만드는 얼굴이 몸의 부분으로서 머리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얼굴을 넘어 온몸에서 표정을 읽어낼 수 있고, 건물에서도, 책장에서도, 공장에서도 얼굴을 본다. 이것이 바로 얼굴은 본래부터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원시인들이 인간적인 머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또한 우리가 보는 다양한 얼굴은 하나의 얼굴의 기준으로 삼아 선별된다. 수퍼스타 예수! 중년 백인 남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화, 얼굴화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타자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얼굴화된 사람들은 타자의 입장을 고려한다거나 탐사한다는 개념이 없다. 그들은 얼굴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끝까지 얼굴화하려고 한다. 낯선 자를 “타자”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원시사회에서이다.



23 아이덴티티를 넘어서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오로지 신경증 환자만이 … 퇴행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기표의 하얀 벽, 주체성의 검은 구멍, 얼굴 기계는 막다른 골목이며, 우리의 굴복과 예속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몸부림 쳐야 할 곳은 그 위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계기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용법을 발명해야 할 도구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기표의 벽을 가로질러서만 모든 기억, 모든 지시작용, 가능한 모든 기표작용과 주어질 수 있는 모든 해석을 무화시키는 탈의미생성의 선들을 그을 수 있다. 오직 주체적 의식과 주체적 열정의 검은 구멍 안에서만 우리는 포획되고 뜨거워지고 변형되 입자들을, 주체적이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해 다시 활력을 주어야만 하는 입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랑 안에서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연결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파선들처럼 구성된다. 오직 얼굴 한가운데에서, 얼굴의 검은 구멍의 바닥에서, 얼굴의 하얀 벽 위에서만 우리는 새들처럼 얼굴성의 특징들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원시적인 머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특징들이 그 자체로 풍경에서 해방된 풍경성의 특징들과 연결접속되고, 각각의 코드로부터 해방된 회화성과 음악성의 특징들과 연결접속되는 조합들을 발명할 수 있다. (359~360쪽)


‘얼굴 해체하기’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문자 없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들뢰즈/가타리는 분명하게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몸부림 쳐야 할 곳은 그 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의미생성과 주체화가 없는 곳에서 시작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도구로 이용하여 새로운 용법을 발명하자고 말한다. 의미생성이 없는 지대를 만들자거나 주체화를 무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의미생성과 주체화와 항상 함께 가는 방식일 것이다.

얼굴 해체하기는 원시인들이 곰의 가면을 쓰면 정말로 곰의 힘과 야성을 갖게 되고, 북서해안 인디언들이 하마차 의식에서 구멍을 통과할때에 역시 정말 ‘식인’을 경험하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것들과 연결 접속하면서 ‘되기’를 실천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얼굴 해체하기는 항상 이렇게 자아 분열의 위험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을까?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탐색하는 머리(장치)(probe-head)’라고 불렀다. 탐색하는 머리(probe-head)라는 말에 힌트가 있는 것 같다. Probe-head란, 어떤 단면(표면)을, 아주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구이다. 신기하게도 Probe-head는 실제로 단면에 접촉하거나 그 표면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 단면과 아주 가까이 가면서 상호간에 일어나는 전기장의 크기를 측정하면서 그 단면을 그려낸다. 얼굴 너머에 있는 완전히 다른 인간성이란 이처럼 다른 사람, 동물, 사물, 사건들과 자연스러우면서도 긴장감 있는 적정한 거리를 갖는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 해체하기 역시 하나의 정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적도 없고 친구도 없다. 하지만 모두가 언제 어느 순간에서 누구와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시도를 놓지 않는 것, 그것은 단순한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얼굴과 전혀 관련 없는 예상치 못한 곳과 연결하려는 실재적인 행동/실천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2019.7.5



  1. 영화 <23 아이덴티티(원제:Split)>에서 인용. [본문으로]
  2. 이반 일리치, , 2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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