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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분자-되기

by 홍차영차 2019. 9. 6.


분자-되기

: <천개의 고원>, 10고원




즉,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 …… 생성은 누군가가 가진 형식들, 누군가가 속해 있는 주체,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들, 또 누군가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들에서 시작해서 입자들을 추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입자들 사이에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을, 누군가가 지금 되려고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우며 그것들을 통해 누군가가 생성하는 그런 관계들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생성은 욕망의 과정이다. p.517





들뢰즈는 ‘되기’의 시작을 ‘동물-되기’부터 시작되었지만, 모든 되기는 “이미 분자적이다.” 여기서 분자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작은 입자,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지각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선다. 8, 9 고원에서 점과 선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삶은 선적이며, 수많은 선들의 횡단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점이 아니라 선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되는 것은 견고한 분할선이 아니라 분자적 분할선=유연한 분할선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자적’이라는 것은 떨림이고, 흔들림이며, 응고된 현재상태에서의 벗어날 잠재적 가능성을 말한다. 모든 방향으로의 잠재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자-되기는 모든 되기에 선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액체’로 만들어서 ‘세상 모든 사람처럼’ 되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시 이웃하는 항들이 되며, 그것들과 근접하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용되는 것이다.


남성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되기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남성이 유달리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의 다수성은 남성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 아이, 그리고 동물, 식물, 분자는 소수파이다. 아마도 남성-기준과 관련한 여성의 특별한 위치가 소수파 그 자체인 모든 생성들이 여성-되기를 통과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p.551


되기devenir에 ‘남성-되기’란 없다. 왜냐하면 현재 세상에서 남성의 권리나 권력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이미 깊고 강하게 응고된 상태, 견고한 권력과 권리 상태에서는 어떤 생성과 창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성은 되기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성들이 여성-되기를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여성-되기, 식물-되기, 광물-되기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그리고 아무도 없는 상태까지 역행해서, 바로 거기에서 다시 무엇을 쌓는 것이다.

여성의 여성-되기, 늙어가면서 아이-되기란 무엇인가? 여성-되기란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거나 진화를 말하지 안는다. 여성-되기란 지금 규정된 여성의 모습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성의 여성-되기가 가능하려면, 흑인의 흑인-되기가 가능하려면 우선 현재의 모습을 허물어야 하고 분자적인 존재, 분자적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정체성을 전제하는 것에서 ‘되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없고, 다만 운동과 정지, 속도만이 있을 뿐이다. 순간 순간 나는 주위의 사물들과 그 리듬을 맞춰서 특이점singular을 구성할 뿐이다.

글쓰기, 회화, 음악이 여성-되기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 글을 읽고, 그 그림을 보고,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음악과 함께 변하고, 생성되며, 전혀 새로운 존재로 전염되기 때문이다.



2019.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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