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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장자

어찌됐든 소 키우는 사람이 필요하다

by 홍차영차 2019. 8. 18.

어찌됐든 소 키우는 사람이 필요하다




上无爲也,下亦无爲也,是下與上同德,下與上同德則不臣. 下有爲也,上亦有爲也,是上與下同德,上與下同德則不主. 上必无爲而用天下,下必有爲爲天下用,此不亦之道也. 위에서 무위하고 아래에서 무위하면 이것은 아래에서 위와 덕을 같이 하는 것인데 아래에서 위와 덕을 같이하면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래에서 유위하고 위 역시 유위하면 이것은 위에서 아래와 도를 같이 하는 것인데 위에서 아래와 더불어 도를 같이하면 군주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는 반드시 무위하여 천하를 부리고 아래에서는 반드시 유위하여 천하에 의해 부려져여 한다. 이것은 바뀔 수 없는 도이다.  (<장자>, 천도편, p.350)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는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최고의 정치 지도자 자리에 있으면서 아테나이를 문화적/경제적/군사적으로 당대 최고의 도시 국가로 성장시켰고, 춘추시대의 관중은 40여년의 기간동안 최고 관리로 있으면서 제나라를 부흥시켜 제환공의 패업을 도왔다. 관중과 페리클레스를 보면서 항상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정치가인가 철학자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을 ‘정치가’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세속적인 성향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관중은 오랜 기간동안 관리로 지내면서 엄청난 부를 쌓았고, 페리클레스는 새로운 아내를 위해서 이혼까지 했다고. 더 깊이 들어가서 질문 하나를 더해보자. 정치가와 철학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활인이 철학을 공부할 때 느끼는 괴리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도 정치가란 피부에 와닿는 현실 속에서 뒹구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저기 높은 구름 속을 걷는 사람이 아닌가? 장자 내편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위(無爲)에 가깝다. 심재(心齋)나 좌망(坐忘), 혹은 왕태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공자보다 더 많은 제자를 거느리는 모습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설득력이 있고 멋져 보이지만, 그 방법론과 윤리학에 있어서 (윤리학이 있긴 한 것인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닌가?

장자의 후대 중에서 황로학파가 걷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고자 했던것 같다. 리우샤오간 역시 황로학파란 “무위와 유위를 통일시키고, 도가의 기본 원칙과 유가, 법가의 군권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진다. 흔히 왕뿐만 아니라 신민 모두가 무위하면 장자 철학이 실현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천도편에서는 이와는 전혀다른 이야기를 한다. 군주는 무위하지만 신하는 유위해야한다. 군주와 신하 모두가 무위하거나 혹은 신하와 군주가 모두 유위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근본은 위에 있고, 말단(행위)는 아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왕이 될 수는 없잖아?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자연스럽게 사계절의 질서와 생사의 변화를 예로 든다.[天尊地卑,神明之位也. 春夏先,秋冬後,四時之序也. 萬物化作,萌區有狀,盛衰之殺,變化之流也] “대저 천지는 가장 영특한 것이지만 그래도 존귀하고 비천함, 앞서고 뒤짐의 서열이 있다.”(夫天地至神,而有尊卑先後之序,而況人道乎).  천도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연결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위(無爲)와  유위(有爲)가 매우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물론,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위의 도를 보여줘야하고, 신하는 그에 맞는 덕을 보여줘야한다. 도가와 유가와 법가의 신비로운 조화! 여기서 다시 장자가 공자를 ‘은밀하고 위대하게’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이 다시 드는건 나만의 느낌인가? 황로파의 이야기는 분명 공자가 말한 인의가 어떻게 전체의 원리로서 도()와 덕()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2019.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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