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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장자

드러나지 않는 덕

by 홍차영차 2019. 7. 18.

드러나지 않는 덕

: <장자> 덕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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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全猶足以爲爾(형전유족이위이) 而況全德之人乎(이황전덕지인호) … 是必才全而德不形者也

몸(外形)을 온전히 갖고 있는 자들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덕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라면. 이는 필경 재능이 온전하고 덕이 겉에 나타나지 않는 일물일 겁니다.

16

何爲德不形德者成和之修也 德不形者 物不能離也 (하위덕불형...덕자성화지수야 덕불형자 물불능리야)

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덕은 사물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덕이 드러나지 않기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한 번 꼬고, 다시 한 번 비틀고. <장자>가 딱 그렇다. 기본적인 스토리 자체가 패러디처럼 펼쳐지는데, 패러디 된 내용은 생각처럼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편의 제5권인 덕충부德充符 역시 그렇다. 덕충부란 ‘덕이 충만하여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덕충부를 보여주는 사례들은 밖으로 드러난 외형이 불완전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못생긴채로 태어났더라고 이후에 덕스러운 삶을 살아왔다면 마흔 즈음에는 행해진 덕이 얼굴에 담겨진다는 믿음이다. 쉽게 생각해서, 매사에 평안하고 여유있으며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나아갈 길과 나올 길을 질 알아서 다른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문제가 없는데 그 얼굴이 매섭고 앙칼져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덕이 충만한 사람은 그 덕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덕충부의 사례들은 여기에 비틀기가 한 번 더 들어간다. 덕충부의 정점이라고 묘사되는 사례에서는 반대로 덕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덕이 마음속에 충만하여 그 조짐이 겉으로 드러남”이 덕충부인데, 덕이 너무나 충만하여서 덕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니.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드러난 덕이란 표현된 지식, 덕‘스러운’ 혹은 영웅‘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스러운’, ‘~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아직 힘이 들어가 있다. 이 행동과 말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는(드러나느) 것들이다. 행동 자체로 보면 덕스럽지만 확실하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힘을 뺐다고 볼 수 없다. 내가 아직 ‘나’인 상태로 있다보니 이는 여전히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포정해우庖丁解牛에서도 3년동안 수련한 백정의 경우에도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소를 기로서 볼 수 있을 경지에서는 그 틈이 넓어지고 칼의 두께가 없어진다고 했다. 나와 칼과 소 사이의 조화가 완성될 때라고 볼 수 있다.




덕이 충만해서 드러나지 않는 추남 애태타의 상태가 포정해우의 마지막 단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동조하는데 주장하지 않고, 아무 말도 안하는 데 신임을 얻고, 공적이 없는데 친밀해지는 상태! 아무 능력없는 범인凡人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능의 완전한 상태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 인간의 질서에 완전히 조화된 사람의 행동 역시 별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 속에 있고, 인간의 윤리에 통달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질서 밖으로 도드라져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내 돛단배에 부딪혀 온 배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배에 사람이 있다면 그 이치를 따져 화를 낼 수도 칭찬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덕의 사람이라면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바대로 하지 않을까.


2019.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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