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양 고전/장자

장자, 알고보니 공자 서포터즈?

by 홍차영차 2019. 8. 18.

장자, 알고보니 공자 서포터즈?

: <장자>, 외편 무군파




“성인이 생겨나면 큰 도둑이 일어난다”는 속담이 있다. 성인을 치고 도둑을 해방시켜 줄 때 비로소 천하는 다스려 진다. 대저 강이 말라 버리면 골짜기가 텅 비고 언덕이 평평해지면 못(의 물)이 가득해진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죽으면 큰도둑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천하가 평화롭고 무사하게 되리라. (그러나)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해도 결국 그것은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셈이 된다. (<장자>, 외편 거협, p.271)



‘도적이 나타나는 것은 성인이 있기 때문이기에, 성인이 죽으면 도둑이 없어지고 천하가 평화롭고 무사하게 되리라’는 말을 듣고 있으면, 장자 철학은 완전히 유가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인이 되지 못해서 안달인 그의 제자들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장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좀 더 생각해보면 장자는 결국 <논어>에서 공자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말했던 ‘인의예지’의 논리를 “은밀하게 그리고 위대하게” 돕고 있는 것 같다.

장자가 성인의 인의(仁義)를 비판하는 이유는 ‘인의’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사람의 본성을 어긋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은 털이 있어 바람이나 추위를 막을 수 있고,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깡충거리고 뛰노는 것’이 말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말에게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궁전과 최첨단 자동차를 준다고 해도 말에게는 소용이 없다. 또한 말을 잘 다루기위해서 인위적인 기준과 도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말 자체의 본성을 벗어나게 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인의’라는 잣대를 만들고 그것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활에 인위적인 제약을 가하게 될 뿐이라는 결론! 좋은 것을 강조하게 되면 더욱 잘 드러나는 것은 악이 될 뿐이다. 장자는 이렇게 본성을 벗어나기보다는 인의를 만들어내는 상대적인 지혜를 모두 버리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장자는 여전히 반유가적으로 보인다.

21세기의 관점에서 공자가 바라는 유가적인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주나라를 위시한 종법제를 잘 지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위계적 체계의 유지 혹은 재생산에 가깝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보면,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자’는 것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러한 유가의 해석 혹은 강조는 신분제를 옹호하고, 위계적인 질서를 강화시키려고 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하는 근대인들에게는 당치않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또한, 통치자들이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사상이 있겠는가? 하지만 <논어> 전체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임금답고, 신하답고, 아버지답고, 자식답다는 것에 새로운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에게 높은 위치(권력이)란 더 높은 덕의 유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사물부터 인간까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장 아름다운 세계로 여겼다. 내편에서 본 애태타의 모습만 떠올려봐도 그렇다. “본성이 가장 잘 보존되는 세계”, 리우샤오간이 <장자철학>에서 무군파의 특징으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지덕지세(至德之世)로’란 제목을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편에서 나오는 이야기들(특히 무군파)은 상당히 민주적으로 보이고, 당시의 시대를 넘어서는 급진성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평등하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고유불변하는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장자의 주장을 유가의 체계에 덧입혀 생각해보면 인위적이고 위계적으로 보였던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어떻게 세상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고, 또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왕이 왕이 되는 것은 형태가 없던 도가 덕을 힘입어 나타난 구체적인 형태일 뿐이고, 왕은 그  본성대로의 특성대로 살아가면 된다. 농부 역시 마찬가지이고, 가죽공 역시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물론, 누가 왕을 하고, 누가 농부를 하며, 누가 가죽공을 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긴 하지만. 하지만 이러한 위치를 결정짓는 것(위치에 있게 되는 것)은 단순한 한 인간, 한 개체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장자의 만물제동 혹은 스피노자식으로 보면 개체란 다른 사물들과의 무한한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 알고 보면 유가를 ‘은밀하고 위대하게’ 지원하는 철학적 서포터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019. 8.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