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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인식의 힘을 믿으시나요

by 홍차영차 2018. 11. 29.

인식의 힘을 믿으시나요







스피노자 철학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이란 오로지 인간의 인식과 이해 수준에 달려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철학에서 감정의 문제 역시 인식에 달려 있고, 윤리의 문제도 그러하며, 기쁨과 슬픔, 욕망의 문제 역시 인식에 달려 있다. 한 마디로,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행복이란 인간 정신이 얼마나 많은 적합한 인식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행복이 인식=앎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그리 낯설지 않다. 소크라테스 역시 철학의 출발점으로 무지의 자각을 이야기했고, 동양철학에서도 오래전부터 지행일치知行一致니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면서 앎과 삶이 하나임을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주장은 이런 철학의 반복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만약 반복이 아니라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식=행함이라는 말은 다른 철학들과 달리 어떤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가?

알면 바뀌는가, 정말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지금도 계속해서 문탁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정말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문탁네트워크는 공부공동체다. 우리는 항상 공부가 삶이(어야 하)고, 공부하지 않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구호는 어떤 이들에게는 헛된 망상 혹은 지적 허영심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같은 지역에 있는 동천마을네트워크에서도 문탁은 유별나게 어려운 텍스트만 보는 곳이라고 소문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공부에 대한 이런 차가운 시선을 그들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많이 안다고, 실제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교수, 판사, 언론인, 정치인, 기업인들의 면면을 보면 더 교만하고, 주변을 돌보지 않으며, 더 황당하고 재수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앎이 삶을 구원한다는 것은 이미 버려진 오래된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란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지식과 타자에 관심을 갖지 않는 반지성주의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근거삼아 이 문제에 분명하게 답해보고 싶다. 먼저 인식이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보자.



인식은 긍정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정보의 축적, 어떤 외적 사실의 획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많이 인식한다는 것은 주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앎을 정의하게 되면 여기에는 삶의 문제가 들어갈 자리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앎의 문제는 지금-여기의 삶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이제 알고 있어도 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제 인식, 즉 지성의 문제는 더 이상 윤리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다 혹은 결부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스피노자의 <에티카>, 공자의 <논어>를 읽었다. 이런 책들을 읽고 나니 정말 삶이 달라졌는가라고 묻는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답할 것이다. 분명 이 책들을 읽고 난 후 우리 삶이란 결코 홀로 구성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내가 갖고 있는 것이란 내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본주의 혹은 개인주의에 맞서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가?

일반 커피보다 공정무역을 통한 커피(상품)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환경을 망가트리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간극은 어디서 발생하는걸까? 내가 텍스트의 반만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와 공자의 이론에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는 AI(artificial intelligence)의 활동은 완벽한 윤리적 행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삶의 모든 문제에서 만능키처럼 언급되는 스피노자의 인식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에게 인식이란 하나의 관념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관념을 이미지로, 그것도 인간의 정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중립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객관적인 관념을 가지고 종합판단을 내리고,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념은 결코 중립적인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관념과의 인과적 연쇄 속에서 존재한다. 또한, 인간의 정신이란 이런 관념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이란 내 맘(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원인삼아 무한하게 연결되어 있는 다른 관념들에 의지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지 않는 결과란 없다는 사실을 <에티카> 초반부터 여러번 반복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부분에서 스피노자는 새롭지만, 우리의 경험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인식을 재정의한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관념의 획득이고, 이 관념은 다른 관념들과의 인과적 질서 속에 놓여 있다. 결과적으로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관념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카카오톡이라는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스마트폰의 노란색의 이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으로 문자를 하고 전화를 걸고 즉각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취소하는 관념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관념을 갖는다는 말은 그것에 대한 긍정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관념을 가졌다는 말은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두 직각과 같다’는 것의 긍정의 표현이 된다. 결과적으로 관념을 갖는 것이 긍정이라는 말은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란 상태가 아니라 활동이고, 정신이 그것에 대해 지향성을 갖는다는 점을 뜻한다.

정리해보면, 인식이란 하나의 관념을 갖는 것이고, 어떤 관념이 내 정신에 생겼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긍정이자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관념이 다른 관념과 어떤 연쇄 가운데 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의 인과질서를 알지 못하는 부적합한 인식이다. 다시 말해 부적합한 인식이란 어떤 관념을 가지면서 그에 대한 긍정과 지향을 갖지만 이에 대한 원인을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그 유명한 발생적 정의에 따르면,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그 원인에 대한 인식이어야 하고, 스피노자는 이를 적합한 인식이라 부른다. 앎이 삶이 되기 위해서, 행복에 이르는 앎이란 결국 적합한 인식의 획득, 그것이 관건이다.



인식은 역량이다 - 관념도 실재, 행위도 실재

적합한 인식의 획득!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이는 철학 그 자체가 품고 있는 인식과 행위, 앎과 삶의 간극과 연결된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앎과 삶의 간극을 어떻게 메우고 있을까?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이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 이로부터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2부 정리 7)


어찌보면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은 매우 간단하다. 1)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였다. 그에게 정신과 신체는 처음부터 결합되어 있는 통일체이며, 정신과 신체는 이것의 서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관념으로서의 개와 짓는 개는 동일한 것으로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이라는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될 뿐이다. 2) 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각각 독립적이어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즉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과 연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처럼, 하나의 신체의 구성과 움직임은 다른 신체의 인관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들이 서로 맺고 있는 질서와 신체들 상호 맺고 있는 인과 질서는 같다. 4) 마지막으로 정신과 신체는 같은 통일체에 대한 다른 표현이므로,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여 전개해보면 스피노자의 평행론적 사고는 정신과 신체,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모든 탁월성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사유 역량과 행위 역량이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오게 된다. 하지만 아직 여기서는 단순하게 사유역량과 행위역량이 동등하다는 점이 나올 뿐이고, 이들이 서로 동시에 평행하게 일어난다는 점은 아직 도출되지 않는다.

알듯 말듯한 심신평행론을 통해서 앎=행위라는 등식을 이해하는데 우리가 겪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 사유속성의 실재성에 대한 뿌리치기 어려운 의구심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행위 역량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평행하게 존재한다는 사유역량은 너무나 자주 (실재성에 대한) 의혹의 눈길을 받는다. 그런데,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 본다면 정신이 갖는 관념 역시 매우 실재적임을 그리고 사유 역량이 행위 역량과 평행하게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관념을 갖는다면 정말 그에 평행한 행위 역량이 동시에 생길까? 또한 과연 지금 이 행위가 지금 바로 획득한 새로운 관념때문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발생하는 눈에 보이는 행위역량을 연결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으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관념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보면 사유역량에 대한 실재성과 동시성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지금 당장 내 정신 속에서 수영, 가족, 자전거타기, 일(임금노동), 승마, 카카오톡이라는 관념이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내 정신 속에 이런 관념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물론, 여기서 하나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말은 단순히 그 단어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관념에서 형성되는 긍정과 지향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관념에 연결된 인과적 질서 역시 바뀜을 뜻한다. “혈연·인연·입양으로 연결된 일정 범위의 사람들(친족원)로 구성된 집단(네이버 사전)”인 가족이라는 관념이 없어진다면 가족을 대하는 내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카카오톡’이 없던 세상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이제 카카오톡을 통해서 문자를 보내고, 뉴스도 보고, 돈도 주고 받는다. 동시대에서 카카오톡을 쓰는 사람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행동방식이 다르다면, 그의 정신 속에 카카오톡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지향성을 가진 행위역량을 보여줄 것이라는 점은 더욱 명확하다.

평행론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개념에서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서 개념으로의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내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역량을 갖기까지는 반복된 실천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수영하는 역량을 익히는 데 실천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평행론적 사고로 살펴보면, ‘수영’이라는 개념을 적합하게 인식하는데에도 똑같이 지속적인 실천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혹자들은 해안가의 원주민들은 ‘수영하다’라는 관념을 모르면서도 물 속에서 다니는 역량을 갖고 있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언어적 표현이나 표상이 다를지는 몰라도 그들은 분명히 수영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평행론에서 적합한 인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구성하는데 심신평행론이 핵심적 개념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피노자는 왜 심신평행론과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정신이 신체 행동의 원일일 수 있고, 신체 행동이 정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상호인과적 관계를 완전히 배제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정신과 신체가 상호영향을 준다는 말은 너무나 쉽게 ‘정신이 신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그 반대로(신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원리로)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정신과 신체를 바라보면 사람이란 곧 영혼을 가진 정신이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 자신과 타자를 바라보게 되면 ‘더 잘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했다’는 가능성의 영역에 너무나 많은 여지를 만들게 된다. 알다시피 이런 주장은 ‘모든 존재가 그 순간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스피노자의 철학과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수영하는 능력이 한 순간에 구성되지 않는 것처럼, 수영에 대한 적합한 인식 역시 단박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간을 들여 반복적 실천을 하면서 구성된다. 현재 내가 수영할 수 없다면, 딱 그만큼이 내가 물과 함께 이뤄낼 수 있는 역량이다. 하지만 물 속에 있으면서 순간 순간 느꼈던 팔동작을 통해서 몸이 떠오르는 기쁨을 기억하고, 반복해서 물과의 만남을 지속한다면 나는 수영에 대한 적합한 인식과 동시에 수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될 것이다.

정신과 신체가 인과적 관계가 아니라 평행론적 관계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우리의 삶에 더 넓은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2부에서 따로 자연학 소론을 펼쳐놓을 정도로 반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가 모른다고 말했다. 데카르트 이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삶의 문제를 오로지 정신의 힘으로서만 풀어내려고 했던 것 같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런 근대의 문턱에서 정신이란 결국 신체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실험할 수 있는 실질적 변수를 하나 더 늘려주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삶을 펼쳐내는 다른 길이 신체성이라는 것은 오로지 강건하고 튼튼한 신체만을 정답으로 찾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정신의 관념이 다른 관념과 어떤 인과관계 속에서 생겨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듯, 우리의 신체의 부분들이 어떤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가지고 있는지에 혹은 우리 신체가 다른 신체와 어떤 인과적 질서 속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합한 인식이든 부적합한 인식이든 모든 인식은 관념이고,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긍정이자 활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적합한 인식이란 그 관념이 다른 관념과 어떤 인과적 질서 속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적합한 인식이란 그것에 대한 절대적 진리 혹은 고정된 이미지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합한 인식이란 그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관념들 사이의 인과질서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책을 읽고 앎을 가졌을 때, 왜 우리 모두는 다 똑같이 자본주의, 개인주의에 대항하면서 삶을 던지지 않을까? 왜냐하면 적합한 인식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정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합한 인식은 분명 그 사람의 관념의 질서에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관념의 연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관념에 대해서 적합한 인식을 획득했다는 것은 자신이 형성한 관념들의 인과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해 적합한 인식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독특성에 따라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삶이 보여줘야 할 차례

공부하는 학인들의 오랜 구호에 이제 다시 대답해보자.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온갖 지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런 질문을 외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구식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에티카> 전체에 걸쳐서 이 질문에 아주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다. 인식이, 적합한 인식이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끔은 스피노자의 너무나 확신에 찬 대답에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와 동양의 사상가와 스피노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기하학적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요청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인 것 같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기하학적 방식을 통해서, 정의, 공리, 정리, 증명으로 써내려갔다. <에티카>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가 말하는 정리들을 다른 정리들과의 인과적 질서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그의 철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게 될 때 다른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분명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망과 더 많은 지식의 축적에 욕심을 내왔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어도 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 스스로가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앎과 삶의 간극은 어쩔 수 없는,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오랫동안 치부해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계속해서 인식의 힘을 이야기하면서 그 어떤 요동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내 마음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상상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이제야 삶과 앎이란 하나라는 것을, 조금 알 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삶이란 다른 삶과의 질서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고, 나의 앎이란 내 옆의 친구의 앎과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처음의 질문을 돌려서 나에게 묻고 싶다. 앎이 삶을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의 삶이 혹은 우리의 삶이 앎을 구원하고 있느냐고. 더 이상 앎에 대해, 앎의 유용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삶이 보여줘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앎 그 자체가 아니라 앎을 구원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을 구성하는 방법인것 같다. 이런 앎은 전해준 스피노자에게 감사하고, 계속해서 그를 벗삼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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