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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17세기의 메커니즘

by 홍차영차 2019. 8. 13.

17세기의 메커니즘



1656년 7월 27일, 그때까지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소논문도 쓰지 않았던 23살의 한 포르투갈계 네덜란드 유대인이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 그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 헤렘(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가혹한 파문의 내용을 포함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금지령과 달리 이 유대인의 파문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유대인의 사상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험에 처할 수 있게 만들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율법 책에 쓰여 있는 있는 모든 징벌로 저주한다. 낮에도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나갈 때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 저주받을 것이다. 주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주의 분노와 질투가 그를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쓰인 모든 저주가 그를 덮칠 것이다. 주가 하늘 아래로부터 그의 이름을 없앨 것이다.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p31)


이뿐만이 아니다. 1670년에 익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신학정치론>은 “사악한 문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책”이라고 여겨졌고, 극단적으로는 “지옥에서 꾸며진 책”이라고 불렸다. 물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의 저자가 스피노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7세기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기에,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기에, 한 사람이 쓴 책에 대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말했을까?




17세기 유럽은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의 지리적 발견, 종교개혁이라는 격벽을 통과하면서 중세가 거의 완전히 해체되고 있었다. 거의 천년 이상 세계 통합의 구심점이었던 교회 권력은 힘을 잃고 있었고,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로 과학혁명을 완성하면서 ‘이성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근대가 탄생하고 있었다.

교회가 힘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앉을 자리까지 빼앗겨버린 것은 아니다. 교회는 원심력이 작용하는 분열된 세계에서 최소한의 구심력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나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오늘날 UN이 그 권위를 전폭적으로 승인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모호한 실체이듯이, 중세의 교황도 세속 군주들이 마냥 의지할 수도 완전히 들질 수도 없는 모호한 존재였다.” (<30년 전쟁>에서 옮긴이 남경태의 글 인용)

1632년, 스피노자가 태어났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이미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고, 에스파냐, 독일,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나라들은 동일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각의 국가 내부의 개인들은 ‘국가’라고 떠올릴 때의 높은 결합도를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17세기 유럽에서 민족과 국가보다는 왕조가 더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귀속감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중요해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은 종교가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종교를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1648년, 스피노자가 16살이 되는 해에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영토전쟁으로 불리는 ‘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30년 전쟁의 발단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보헤미아 제국의 신교를 탄압하면서 일어났다. 신교도들은 궁전에 있던 가톨릭 참사위원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30년 전쟁은 황제-교황-군주들의 정치적 분립과 가톨릭-루터파-칼뱅파의 종교적 대립이 서로 엮이면서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교황과 황제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제국’을 공고하게 하고 싶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수많은 공국들은 이들에게서 벗어난 독립된 자주권을 갖고 싶어했다. 자연스럽게 많은 공국들은 가톨릭이 아니라 신교인 루파터와 칼뱅파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30년 전쟁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전쟁의 목적은 종교적 신앙심의 회복이 아니라 더 많은 영토에 대한 투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명백한 사례가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가톨릭 신도를 거느린 유럽 제일의 가톨릭 국가이다. 일찍이 자국의 신교도(위그노)를 잔인하게 탄압했던 나라이다. (물론, 1598년 낭트 칙령을 통해서 위그노들의 자유를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신교도들과 함께 하며 가톨릭 수호의 명분을 내세운 신성로마 황제와 싸우는 반황제파쪽에 서게 된다. 프랑스의 이같은 행동은 30년 전쟁이 더 이상 종교전쟁이 아니라 영토전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내용을 보면 그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조약을 통해서 네덜란드는 1566년 시작된 에스퍄냐로부터 독립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1555년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결정을 재확인하면서 루터파와 함께 칼뱅파도 종교적 관용의 대상으로 인정받았다.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이뿐 아니라 이 조약을 통해서 근대적 주권의 내용이 명시되었다. 프로이센이든 보헤미아든 황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스리고 동맹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공국이 ‘주권국가’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출간한 1670년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영토 전쟁의 시작이라고 말한 것처럼, 명실상부한 종교의 자유가 이뤄지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아니, 바로 이런 이유로 ‘새로운 종교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019. 08.07



* 연대별 사건 및 출판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1536년 칼뱅의 <기독교 강요> 출판

1543년 코페르니쿠스 <전체의 회전에 관하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루터파를 인정

1566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작 (에스파냐로부터)

1609년 케플러의 행성운동

1618년 30년 전쟁 : 보헤미아 지역의 신교탄압과 반발로 시작

            프랑스/에스퍄냐/네덜란드/독일/스웨덴/덴마크/이탈리아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 로마 이단심문소의 재판

1637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종교적 자유와 근대중앙집권국가의 출발

1667년 홉스의 <리바이어던>

1670년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1678년 스피노자, <에티카>

1687년 뉴턴의 <프린키피아>


* 연대별 인물

마틴 루터 (1483~1546)

쯔빙글리 (1484~1531)

칼뱅 (1509~1564)

프란시스 베이컨 (1561~1626)

갈릴레오 (1564~1642)

케플러 (1571~1630)

홉스 (1588~1679)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스피노자 (1632~1677)

존 로크 (1632~1704)

아이작 뉴턴 (1642~1727)

루소 (1712~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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