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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자유라는 통념에서 벗어나기

by 홍차영차 2018. 9. 14.

‘자유’라는 통념에서 벗어나기

 

 

 

 

 

자유 의지 - 있다? 없다?

자유라는 말에 사람들은 ‘내 마음(감정)가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고 선택하는 것을 떠올린다. 말 그대로만 본다면 자유에 대한 이러한 통념은 스피노자의 정의와 정반대다. 스피노자의 자유는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인간이 정념적(감정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인간이 정념적’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성적으로 완벽한 이상적 인간이 아니라 질투, 증오, 사랑, 미움과 같은 수많은 정념들에 흔들리는 인간이 스피노자 철학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왜 정념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 조건은 모든 것의 인식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 신체와 외부의 접속에서 일어나는 변용이다. 자동차 크랙션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감탄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 신체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신체는 눈, 코, 입, 심장, 간, 혈액, 뉴런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고, 나의 신체와 접속하는 외부의 물체들 역시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대상들도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변용이 어떤 원인으로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채로 정념에 휩싸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또한 그러한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즉, 사람들이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선택은 그 인과 관계에 대해서, 그 원인을 모르고 행동하는 ‘무지’일 뿐이다. 

우리는 우연히 본 ‘파란색 체크 무뉘 옷’을 입은 철수에 대해서 (그 이유를 모른채) 좋은 감정을 갖기도 하고, ‘장미향이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은 영희를 마주쳤을 때는 (똑같이 이유를 모른채) 불쾌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내가 왜 철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영희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결과로 이유를 설명할 때가 많다. 이런 이유때문에 스피노자는 내 마음대로 행위하고 선택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념에 예속된, 무지 상태에 있는) 노예에 가깝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란 정념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으로부터의 해방, 곧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다.

 

더 많이 알면 더 자유로워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말해보자면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자연의 질서, 즉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이 서로서로 엮여져 있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최대한의 인식이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의 자유는 1종 인식인 절단된 인식, 혼동스러운 관념에서 벗어나 2종인식인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적합한 인식, 공통개념의 형성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

앞서 스피노자에게 자유의지란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 정신 안에서 어떠한 의지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신이란 관념들의 집합이므로, 우리의 정신이란 무한한 원인들에 의지하도록 규정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관념을 갖는다는 말은 그것에 대한 긍정이고, 정신이 다양한 관념을 가지게 되면서 의지를 갖게 되는 과정이다. 삼각형의 관념을 가졌다는 말은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두 직각과 같다’는 것의 긍정을 함축하고 표현한다는 뜻이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의지란 지성과 다름이 없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공통 개념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존의 차원은 우리로 하여금 부적실한 관념을 갖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념이나 외부 물체의 관념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외부 물체가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를 보여주는 변용과 변용의 관념만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효과로부터 외부 물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공통 개념은 나와 외부 물체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토대로 구성되는 신체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공통 개념은 우리의 실존의 조건을 감안할 때, 적합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적합한 인식이란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 인식이고, 그 사건이 일어나는 혹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인과적 필연성의 인식이다. 그런데 인과적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과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파도타기를 생각해보자.[각주:1] 파도의 세기는 매번 달라지고 내 몸의 상태도 매번 다르다. 파도와 널과 내 몸이 만드는 관계를 잘 알아야 파도타기에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전에 성공한 방식 그대로를 똑같이 다음 파도타기에 적용할 수는 없다. 날씨도 다르고, 파도 높이도 다르며, 바람도 다르고, 내 신체의 상태도 다르다. 우리는 파도와 널과 내 몸이 만들어내는 인과적 필연성을 원리적으로 파악하여 적용할 때 매번마다 파도타기에 성공할 수 있다. 즉 파도타기에 성공했다는 것은 파도타기에 자유로워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성공했다 하더라고 꾸준히 하지 않으면 그 리듬을 잊어버리기 쉽다. 이렇게 우리 신체가 다른 사물과 공통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데 유능해질수록, 나와 다른 신체들 사이의 인과적 필연성을 더 잘 알수록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낯선 타자들과 마주칠 때 양쪽이 모두 파괴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합을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고(감정역학),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도 결국은 이런 필연성(동역학)을 배우는 과정이 된다. 즉,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나와 다른 사람들간에 공통 개념(적합한 인식)을 구성했기 때문이고, 내가 두 발 자전거를 완벽하게 탈 수 있는 것도 나와 자전거 사이에 ‘공통 개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통 개념이란 나와 친구의 관계 혹은 자전거를 타는 관계가 전체 우주의 질서의 인과 관계 안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통 개념이란 이성을 말하는데,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사람이 더욱 더 이성적이 된다는 말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롭다는 말은 그 사건의 인과적 필연성을 인식하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에 대해 더욱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역량은 반비례가 아니다

좋다. 더 많이 알아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공동체는 이런 자유로운 인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유에 대한 통념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개인과 공동체는 일종의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공동체란 공포(와 희망)으로 움직이지, 이성적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가 커질수록 공동체는 약해지고, 공동체의 역량이 커진다는 것은 개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또 한번 전복시킨다. 개인의 역량과 공동체의 역량은 반비례가 아니라고.

자유로운 인간이란 그 순간에 낯선 타자들과의 마주침에서 공통 개념(이성)을 구성하여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공통 개념은 서로 다른 존재들의 우연적 만남이 지속될 때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독특한 실재들이 자신의 독특성들을 교환하면서 형성되는 공통 개념은 1종 인식에서 이루어지는 정념들, 일반적 관념들에 의한 생각들을 정정해주고, 점점 더 ‘자연적 필연성’에 의한 관념의 연쇄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공통개념을 구성한다는 것, 이성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점점 덜 혼자서 사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인과 공동체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역량을 위협하지 않을까? 위협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가 더욱 더 늘어난다는 것은 점점 더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이고, 이는 점점 더 많은 사람(사물)들과 공통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의 향상이다. 또한 이성적인 사람들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 역시 이성적이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역량 모두가 자연적 질서, 우주의 인드라망의 인과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공동체에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자유인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그 공동체의 역량이 역대급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2018. 9. 14

 

 

 

 

 

 

 

 

 
 
 

 

 

 

  1. 파도타기에 대한 사례는 함께 공부하는 달팽이의 2018년 스피노자 에세이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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