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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코나투스, 자유 혹은 안전?

by 홍차영차 2018. 8. 4.

코나투스, 자유 혹은 안전(보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의 본질이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이고,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3.7)다. 그렇다면 코나투스는 자유인가 안전인가?

<신학정치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에 대한 강력한 주장으로 펼쳐진다. 1672년의 오라녜파의 혁명을 생각하지 않더라고 삶과 정치에서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스피노자가 충분히 이해된다.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우주가 변화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그 몇 년의 시간에서 스피노자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자유가 아니라 안전”

스피노자는 더 이상 시민사회의 목표로 ‘국가의 목적은 자유’라는 테제를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시민사회의 구성적 계기로 근거를 두었던 ‘사회계약’도 언급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정치론>에서  자유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으면서 “시민사회의 목적은 평화 및 안전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라는 새로운 테제를 발제시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자유에서 안전으로 바뀐 것인가? 삶의 지표가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보존과 안전이라는 말은 확 와닿지 않는다. 자유를 조금 잃어버리더라고 존재 자체의 안전을 삶의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스피노자는 정치의 새로운 대상으로 대중들과 대중들의 역량의 문제를 가져온다. 스피노자는 권리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개개인들이 계약을 통해서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 스피노자는 개체성 자체를 다르게 정의한다. 그는 타자의 권력에 의존하고 그의 역량에 종속되는 것은 각 개체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개체성을 보존하고 긍정하기 위한 실정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권리란 역량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인간들은 권리상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재한다’는 정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권 역시 마찬가지다. 주권자의 권리는 실제로 신민들이 복종하도록 만들 수 있는 그의 능력 이상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이제 권리는 ‘의무’ 개념과 관련하여 정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량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갖는다. 곧 무제한적인 어떤 권리는 무한한 역량을 표현할 테지만, 이는 신이나 또는 자연 전체에 대해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오직 신(곧 자연 전체)만이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다.

스피노자는 권리와 역량의 등가성으로부터 곧바로 정치적 분석을 위해 중요한 비판적 결론들을 이끌어낸다. 1) 권리의 평등. 자연상태와 가까운 무정부적 상황에서 개인들의 평등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일 뿐”이다.(2.15) 개인들이나 한 국가의 모든 시민 사이의 내용 없는 평등이 아닌 진정한 평등은 제도들 및 집단적 실천의 결과로만 성립할 수 있다. 2) 개인들 사이의 계약 관계는 미리 실존하는 어떤 의무의 결과가 아니라 ‘이중적인’ 권리 또는 새로운 역량의 구성이다.

스피노자는 자유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를 새로운 개념으로 제안하고 있다. 코나투스는 자유이자 안전이다. 자유와 안전은 역량만큼 드러난다. 역량은 신 즉 자연의 일부로서 ‘필연성’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만큼이다.



2018.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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