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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참된 인식이 만드는 능동 정서

by 홍차영차 2018. 8. 3.

참된 인식이 만드는 능동 정서

: 수동passion과 능동action 그 이분법을 넘어서







능동적인 사람이 되라고?

“능동적으로 일하자!” 혹은 “능동적인 사람이 되야지.” 학교에 다닐 때나 회사에서 일할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능동과 자유는 실제의 모습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말하는 행동들은 대개 ‘충동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왜 그렇게 하고 싶은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고, 능동적 행동이란 오로지 자기가 안건을 내거나 주도할 때 뿐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외부의 조건들에 휘둘리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다.

스피노자 정치학과 인간학의 독창성은 바로 이 부분에서 반짝거린다. 스피노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인간을 자연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자연 바깥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바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우연한 외부적 마주침으로 인해서 수동적 정서에 노출될 수밖에  자연적 실재들일 뿐이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인간을 정념적passive 존재로 이해했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념적 인간들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잘 살기 위해서 자유로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수동이란 무엇이고,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 가능한지를 살펴봐야한다.



1. 수동과 능동, 그 두 가지 종류의 원인

일반적으로 수동은 당하는 사람이고, 능동은 행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일 혹은 운동을 스스로가 만들어냈을 때는 능동이고, 주어진 운동이나 일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것을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수동, 능동 개념은 그 원인과 결과를 이분법적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한 사건이나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수동/능동이 결정되어 버린다. 즉 이런 관점에서는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 불가능하다.

능동적이 되라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면서 정작 주어진 환경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과연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수동과 능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은 실존 조건상 수동적passive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인간을 고립된 원자로 바라보기보다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상호 연결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 신체는 무수히 많은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신체는 다른 물체(신체)를 변용시키고, 다른 물체들에 의해  매 순간 변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변용은 신체(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와 대상(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 상호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변용과 변용들의 관념인 정서affection를 모두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 개념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데카르트의 수동/능동 개념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수동/능동은 데카르트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게 능동은 어떤 운동을 개시하는 것, 따라서 그 운동의 원인을 의미한다. 반대로 수동은 어떤 운동을 받아들이는 것, 즉 운동의 결과를 의미한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내가 운동의 원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어떤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반대로 다른 사람이 일으킨 운동의 결과로 어떤 일을 당할 때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수동, 능동 개념은 원인과 결과라는 이분법적 관점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능동적이라면 다른 사람은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즉 이런 관점에서는 어떤 사건, 운동에 참여하는 모두가 능동적이 될 수가 없다.

스피노자의 수동, 능동개념은 데카르트와 어떻게 다를까? 우선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지 않고, 원인의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곧 스피노자는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능동적이라고, 반대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수동적이라고 부른다.[각주:1]

정리해보면 스피노자에게 능동은 변용이 그 개인의 본성으로부터 명석판명하게 설명될 수 있을 때를 가리키며, 수동은 그 개인이 이러한 변용의 부분적 원인에 불과할 때를 가리킨다.[각주:2] 따라서 스스로가 변용의 적합한(전체적) 원인이냐 아니면 부적합한(부분적) 원인이냐에 따라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 하는 것이 평가된다. 

스피노자 관점에서 수동과 능동의 문제는 적합한 관념, 참된 인식의 문제가 된다. 모두가 적합한 원인을 파악한다면 두 사람 모두가 능동적이 될 여지가 생긴다.





2.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수동/능동은 원인과 결과이기 때문에 (모두가 능동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은 어떻게 가능하고, 또 왜 필요할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우연적 마주침에 의해 어떤 변화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능동의 여지, 자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동적인 상태에서도 우리는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념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은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으로 정의되는데, 기쁜 정서에서 더 큰 완전성이란 역량의 증가를 의미한다. 우리가 기쁜 정념들을 마주치고, 이를 통해 역량의 증대를 이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정념으로서의 기쁨, 수동으로서의 기쁨이 아니라 능동 정서로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참 쉽게 정념적(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이런 이행은 거의 잘 일어나지 않는다. 왜일까? 기쁨-슬픔-기쁨-기쁨-슬픔-......의 무한 궤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참된 인식, 어떤 사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 상호 인과 관계들을 파악해야 한다. 수동/능동 개념을 정의했던 3부 정의 2를 1부 정의 7의 자유의 개념과 결부시켜 살펴보자.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에티카>, 1부 정의 7)


1부 정의 7을 보면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를 말하고, 제약되었다는 것은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말하듯 자유란 내 마음대로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 인과 관계를 파악하고, 그 필연성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능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 슬픔에서 수동적인 기쁨으로, 다시 수동적인 기쁨에서 능동적인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이성의 힘으로 공통 통념을 형성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공통 통념이란 변용을 일으키는 신체와 변용되는 신체 사이의 공통되는 것으로, 내 신체 위에 새겨지는 흔적인 정념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조직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외부의 우연적 마주침에 따라 역량의 증대,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각주:3] 정념으로서의 기쁨은 순간적이지만 역량의 증대를 경험하고, “정신은 신체의 활동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증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상상”라려고 하기 때문에, 계속 해서 이와 유사한 것을 상상하면서 기쁨을 느끼려고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힘을 얻은 “이성의 인도에 따라” 능동적인 기쁨을 조직할 수 있다면 이제는 상상이 아닌 공통 통념-적합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다. 수동 기쁨에서 능동 기쁨으로의 이행에서 공통 통념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3. 능동 정서를 만드는 이성

이제 슬픔 정념에서 기쁜 정념으로, 그리고 기쁜 정념 가운데 참된 인식을 통해서 능동적인 기쁨을 조직했으니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 완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참된 인식에 도달하면 삶이 능동적으로 될까, 자유로운 삶을 계속해서 (재)생산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반복해서 말했던 것처럼 참된 인식 자체만으로는 정념의 위력에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즉 정서는 반대되고 더 강한 다른 정서가 아니고서는 억제되지 않는다.[각주:4] 인간들은 태양이 저 멀리 수십만 km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태양을 200보 떨어진 것으로 느껴지는 신체적 정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각주:5] 

다행히 스피노자는 이것에 대한 해결책을 <에티카> 4부에서 말해주고 있다. 즉 참된 인식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 새로운 인식이 ‘능동 정서’와 결부되어야 한다고.[각주:6] 이러한 인식을 통해 발생하는 능동 정서는 정념이 만들어내는 가상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그렇다면 정념이 아닌 능동 정서라는 것은 무엇이고, 정념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에서 정서에 대해 두 개의 정의를 보여준다. 3부 초반부에서는 정서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 혹은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이자 변용의 관념’[각주:7]이라고 하고, 3부 마지막 부분에서는 정서를 ‘마음의 정념이라고 불리는 혼동된 관념’[각주:8]으로 정의한다. 정서affection에는 수동 정서, 능동 정서가 있지만, 정념적 존재에서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념들passion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4부 ‘인간의 예속에 대하여 또는 정서의 힘에 대하여’ 바로 앞에서 정서에 대해 다시 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3부에서 다루는 정서는 대부분 수동 정서, 정념에 할애되어 있다. 실제적으로도 인간이 겪는 정서의 대부분은 정념적이다. <에티카> 3부에서 충분히 감정역학을 이야기하고 나서 ‘정념에서 벗어날 길이 없나’ 절망할 즈음에 스피노자는 능동 정서에 대한 단초를 던진다.[각주:9]

능동 정서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앎에서 나오는 기쁨’과 다르지 않다.[각주:10] 왜냐하면 좋음과 나쁨에 대한 인식이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한에서 기쁨이나 슬픔의 정서와 다르지 않고[각주:11], 우리가 수동적 정서에서 수행하는 모든 행위를 우리는 ‘이성’에 의해 수행하도록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2]



이 정도까지 왔으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이란 자유와 다르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사람이다.

스피노자에게 수동과 능동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앎의 문제다. 자신의 존재가 행위로 규정되고, 이런 행위가 어떤 인과 관계 속에 있는지 파악하는 사람이 바로 자유로운 사람, 이성으로 인도되는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스피노자에게 이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고 살아가려는 사람은 덕에 따라 절대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에게서 덕에 따라 절대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이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고 살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이는 자신의 고유한 유용성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4부 정리 24)





2018. 8. 3



* 참고 도서

1. <에티카> 3부~4부,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진태원, 철학박사학위논문

3. <비물질 노동과 다중> 中에서 '정동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 갈무리 출판사

4.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질 들뢰즈, 인간사랑






  1. <에티카> 3부 정의 2 :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으로만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다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2. <에티카> 3부 정의 1 : 나는 그 결과가 원인 자신에 의해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을 적합한 원인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원인 자신만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것을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3. <에티카> 3부 정리 15 :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에 의해 기쁨과 슬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본문으로]
  4. <에티카> 4부 정리 7 : 정서는, 억제되는 그 정서와 상반되고 더 강한 다른 정서가 아니고서는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본문으로]
  5. <에티카> 2부 정리 35 주석 [본문으로]
  6. <에티카> 4부 정리 14 : 좋음과 나쁨에 대한 참된 인식은, 참된 것인 한에서는 어떠한 정서도 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정서로 간주되는 한에서만 억제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에티카> 3부 정의 3 : 나는 정서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거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본문으로]
  8. <에티카> 3부 정서에 대한 일반적 정의 : 마음의 정념이라고 불리는 정서는 혼동된 관념으로, 정신을 이것을 통해 자신의 신체나 그 신체의 부분들 중 하나의 실존의 힘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다고 긍정하며, 이것의 현존은 정신이 저것보다는 이것을 사고하도록 규정한다. [본문으로]
  9. <에티카> 3부 정리 58~59 [본문으로]
  10. <에티카> 3부 58 증명 : 정신은 적합한 관념들을 인식하는 한에서, 곧 능동적인 한에서 마찬가지로 기쁨을 느낀다. [본문으로]
  11. <에티카> 4부 정리 8 : 좋음과 나쁨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한에서의 기쁨이나 슬픔의 정서와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12. <에티카> 4부 정리 59 : 우리가 수동적인 정서에 의해 수행하도록 규정되는 모든 행위를 우리는 수동적인 정서 없이 이성에 의해 수행하도록 규정될 수 있다. (증명) 이성에 의해 행위하는 것은 그 자체만 고려된 우리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들을 실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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