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피노자

루소에서 맑스로, 맑스에서 스피노자로

by 홍차영차 2018. 8. 4.

루소에서 맑스로, 맑스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 <스피노자, 루소, 맑스 :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와 정치적인 것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치”는 곧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 “la politique”이다. 프랑스 정치 철학자 클로드 르포르는 ‘라 폴리티크’는 정치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인간들이 세계 및 자신들 사이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사회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산출적 원리로서 ‘정치적인 것le politique’를 제안한다. 르포르에 따르면 넓은 의미의 사회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경제, 종교, 문화 등과 같이 사회의 한 제도로서 정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 자체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게 곧 정치이다.





루소에서 맑스로

원제목과 달리 옮긴이는 논문의 제목을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바꿨다.[각주:1] 내용의 요약으로는 바뀐 제목이 좋지만, 원제목은 논문의 구조를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원제목은 <정치적인 것, 정치, 루소에서 맑스로, 맑스에서 스피노자로>이다.

근대의 철학이란 결국 ‘주체의 능동적인 자기-구성’에 관한 이론인데, 이러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의 탁월한 대표자”(234)는 바로 루소이다. 프랑스 혁명이 정확히 루소주의적이지는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사회계약론>이 없었다면 급진적인 혁명의 원동력은 그 자신의 언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에 따르면 입법은 인민주권의 표현으로서 내재적인 것이 된다. 주권은 통치와 분리되고, 정치는 규칙들의 집합이나 통치기술로부터 단절된다. 정치는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포함한 그 어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민 스스로의 입법 활동과 인민 스스로 구성한 권력에 기초한다. 이런 관점에서 루소가 말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란 “정치의 ‘진리’와 ‘현실성’은 그것의 고유한 영역 속에 그것의 고유한 자기의식이나 활동에 존재하는 것”(234)이다.

하지만 맑스에게 “정치의 진리와 현실성”은 “그 자체의 바깥에, 그 ‘외적’ 조건들과 대상들에 존재”하고, 이러한 정치의 외재성은 정치를 내생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정치의 타율성이 핵심적인 문제로 올라온다. 맑스는 루소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점을 제시”(234)하고, 정치 외부의 경제 영역에서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찾는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타자를 경제 영역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스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규정하는 타자로서 경제를 제시했을 때, 그말은 경제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 곧 최종 심급의 지위를”(323) 갖는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또한 타자가 꼭 경제, 한 가지만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맑스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루소에서 맑스로 넘어갔던 새로운 주체의 문제는 이제 스피노자에게 넘겨진다.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이제 맑스의 기획은 새로운 성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와 맑스는 공통으로 ‘대중들’의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역사에서 대중들의 역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해방과정에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역사의 주체의 또 다른 형상이 아닌가? 여기에는 악명 높은 복잡한 문제가 존재한다. 피히테의 ‘민족’과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분명한 대칭성(따라서 이론적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마치 지난 두 세기 동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들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들 사이에 항상적인 대칭성이 존재했던 것처럼, 이 두 개념은 또한 (도덕적) 공동체와 정체성에 관한 개념이다. 그러나 또한 맑스의 ‘유물론’에는, 정확히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에 주체의 표상의 해체라는 분명한 요소가 존재한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보다 독창적인 이론적 공헌일 것이다. 해체는 ‘자연의 인간화natural-human’ 과정으로서의 착취 분석과 계급투쟁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의 결과이다. 여러 측면에서 맑스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에서 주체라기보다는 비주체이다.”[각주:3]

이러한 혼란스러운 주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를 재소환한다.



맑스와 스피노자를 비교해보면 맑스는 스피노자가 설명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고,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맑스가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즉, 스피노자는 대중들의 이론에서 ‘심리적 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맑스는 대중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역사적 이론’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에서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가지고 있는 양가성, 대중들이 느끼는 공포와 대중들이 만드는 공포 그 자체에서 민주주의 개념의 원리를 다시 발견한다.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에서 나타난 모순들을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와 연결시켜보자고 제안한다. 첫 번째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통념, 혹은 더 정확하게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피지배자 없는 지배’라는 잠재적 아포리아와 관련되는데, 이는 동시대 정치투쟁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논의에서 맹점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인과성에 관한 설명에서 잃어버린 고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두 번째 기본적인 난점은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대중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유산된 변증법의 현존과 관련되는데, 이는 이미 맑스의 초기 저작들에서 출현하여 <자본>에서 구조적 기능을 실질적으로 획득하고 ‘후기’ 엥겔스의 탁월한 에세이들에서 바로 정치의 ‘본질’이라고 거의 인식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적 ‘결정론’ 내지 목적론에 의해 은폐되고 중화된다. 발리바르는 이상의 ‘아포리아적’ 탐구들로부터 맑스주의 이론이 결국 그 내적 모순들 때문에 붕괴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반대하며, 이 관점을 특히 20세기 후반 ‘세계-경제’, ‘세계정치’, ‘세계소통’에서 인종주의의 새로운 형태와 기능에 관한 문제들과 밀접히 연결시켜보려고 한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타율성이라는 반정립을 넘는다는 것은, 맑스의 질문들과 스피노자의 질문들의 상호보완성을 정치에 대한 현재의 사고를 위한 특권적 지평에서 시도하는 것이다. 즉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보여준 물티투도, 그리고 새로운 개체로서의 관개체성에서 계급, 사상, 민족을 횡단할 수 있는 개념을 발견한 것 같다.


2018. 06.28





  1. 원래 제목은 <정치적인 것, 정치, 루소에서 맑스로, 맑스에서 스피노자로>이다. p231 [본문으로]
  2. Etienne Balibar, “Preface,”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옮긴이 김정한, <대중, 계급, 사상> 서문 [본문으로]
  3. Etienne Balibar, “Preface,”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옮긴이 김정한, <대중, 계급, 사상> 서문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