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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스피노자 정치학으로 보는 문탁네트워크

by 홍차영차 2018. 4. 3.

(2017년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썼던 에세)

스피노자 정치학으로 보는 문탁네트워크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에 대해 우리는 ‘문탁에는 대표도 없고 조직도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동시에 문탁에 고정된 제도나 법칙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문탁에서 1, 2년 공부하고 활동한 사람들조차도 문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인문학) ‘공동체’라고 말하는 곳에 기본적인 구조가 없을 수는 없다. 분명 문탁에서도 뭔가를 함께 결정하고, 운영회의를 비롯하여 수많은 회의가 이뤄지며 새로운 공부와 활동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문탁의 운영원리를 모르겠다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 문탁의 의사결정방식이 다른 조직과 상당히 다르고, 규칙과 제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탁의 운영방식은 한 편에서 보면 ‘끼리끼리’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문탁의 운영에 함께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탁 운영원리들이 모호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불합리하게 보일 때가 있다. 때때로 문탁에 ‘대표’도 있고, ‘조직’도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문탁 역시 몇몇 사람들(대표, 사장님?)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공통감각이 떨어져서 그런걸까?


  1. 문탁의 의사결정은 민주주의적인가

한 가지 사례를 통해서 문탁의 의사결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2017년 ‘글쓰기강학원’은 1년 내내 스피노자를 공부했고, 1년의 스피노자 공부를 갈무리하는 방식으로 2017~2018년 겨울에 스피노자 강좌를 열기로 했다. 어떤 내용으로 강좌를 할지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중간단합대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논의를 한 끝에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를 중심의 강좌를 하자고 결론내렸다. 이후 진행은 임시연구기획팀에서 맡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 11월 운영회의 때 제시된 강좌는 중간단합대회의 논의와 달라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중심으로 한 제안이었다. 어떻게, 언제 바뀐 거지? 공식적인 회의 혹은 공지가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공통감각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에 요즘에는 이런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관심을 갖지 못한 나를 탓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내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던 건가. 사실은 문탁의 의사결정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난 이 강좌가 어떻게 진행될지 관심이 많았다. -.-;;)

어떤 의사결정이 바뀌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것은 논의 사항이 바뀐 부분에 대해서 아무도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아주 친밀한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논의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주제로 공부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이런 방식의 결정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헷갈려졌다.

2017년에 공부한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념적 흔들리는 인간들이 왜,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논의는 ‘정치학’으로 귀결되고, 미완성작인 <정치론>에서 최선의 국가상태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체계를 제시한다. 그런데 <정치론>에 나오는 제도와 규칙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보였다. 인간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 최고권력을 통한 국가를 구성해야 하며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군대가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기하학적 방식과 증명을 통해서 <에티카>를 썼던 스피노자도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할 말이 없던 것일까.

하지만 마트롱을 통해서 다시 읽게 된 <정치론>은 새롭게 다가왔다. 앞서 제기했던 의구심에 답할 수 있는 단초가 보였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단지 거대한 규모의 국가 정치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규모의 친구관계로부터 문탁네트워크와 같은 공동체에서도 고려해볼만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으로 나누고 아주 자세하게 그 체계를 그렸던 것은  정치를 머리속에서 관념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현하는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 말하는 정치의 원리를 바탕으로 문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특히 사조직화된 모습으로 보이는 의사결정 방식을 스피노자의 눈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와 자연권을 바탕으로 잘 보이지 않던, 그래서 오해와 이해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문탁의 운영원리를 살펴보자.


2. 스피노자 정치학

자연권은 살아있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E.3.7)”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르고, 이는 스피노자의 정념론, 정치학, 도덕론 전체를 아우르는 출발점이다.[각주:1]

자연에 속하는 모든 것이 코나투스를 갖고 있으며, 이 코나투스가 자연권의 토대이다. 그런데 코나투스를 갖고 있는 개체들은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시간성과 장소성을 가지고 드러나는 개체들 모두가 자신의 확장하려고 하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성의 법칙처럼 개개의 사물들은 외부의 원인이 아니고서는 파괴되지(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진 인간(개체)들이 갈등 없이, 경쟁하지 않고 조화롭게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홉스 말대로 모든 사람이 자연권을 가진 상태로 그대로 둔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의 자연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자연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모두 최고권력(국가)에게 위탁해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상태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자연권을 주장할 수 없고, 국가의 판단에 따라 살아야한다. 그런데 지금 누가 홉스의 국가에 살고 싶을까? 근대의 거의 모든 투쟁들은 개인의 자유를 옭죄려는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탈출이었고,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담보로 하는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워졌다.

스피노자 역시 출발은 같다.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가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려고 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어떤 조건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자연권에서 시작한다. 심지어 그는 정치론에서 이렇게까지 말한다. “신의의 약속은 그렇게 약속한 사람들 간의 의지가 변하지 않을 동안에만 효력을 지닌다. (중략) 자기에게 이득보다는 손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약속을 파기하기로 결심하고 자연권에 의거, 실제 파기할 수 있다.”(<정치론>, 2.12) 약속을 했더라도 언제든지 약속을 깰 수 있다면 어떻게 상호 신뢰가 가능할까?

놀랍게도 스피노자에게 자연권은 국가를 국성하는데 장애물이 아니라 전제가 된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을 발생시키는 자연법칙”(<정치론>, 2.4)으로 자연권을 이해한다. 즉, 국가 상태가 되었다고 물리법칙이 바뀌지 않듯이, 인간이 가진 자연권도 그렇다. 자연권의 이유는 ‘개별사물이 존재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코나투스가 결국 개체의 지속이며 확장이라면 자연권을 가진 개체들은 안전하면서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 홀로 외부의 위험에 대처하기란 불가능하다. 끝없는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런 이유로 자신과 비슷한 존재와 협력하는 것은 개체의 존재론적 요구 사항이 된다. 즉 자연권이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권은 언제라도 자신이 손해가 되는 상황이 되면 어떤 약속이라도 깰 수 있는 권리이지만 이는 동일하게 개체와 개체가 함께해야 하는 전제가 된다.


정념적 인간들로 구성된 국가 

스피노자 국가상태에서는 홉스의 그것과 달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연권을 모두 내놓지 않는다. 아니, 자연권이란 ‘개별사물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힘’인만큼 내놓을래야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국가는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확장시키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본성을 어떻게 볼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스피노자는 인간 개체를 이야기할 때 정념에 대한 부분을 나쁘다 좋다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로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국가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여러감정, 예를 들면 사랑, 미움, 질투, 명예심, 동정심을 인간 본성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는“사실상 망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유토피아나 유용성이 거의 없어서 시인이 지어낸 황금시대 같은 데에서나 실현될 만한 정치이론”(<정치론>, 1.1)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실천이 가능한 방식을 고안하고자 했다. 바로 이 점이다. 스피노자는 이상적/비현실적 인간을 기준으로 국가 상태를 구성하지 않는다. 정념적으로 반응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함께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스피노자 국가의 씨앗은 이성적 힘이 아니라 정념적 상태에서 이뤄진다. 무서운 공포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생각이나 더 큰 보상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서 사람들은 모인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비이성적인 인간들이 모였다고 해서 갑자기 이성적이 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모여서 토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강제한다. 경험상으로도 (2명이 아니라) 3명 이상이 모여서 서로의 입장을 맞출 때면, 누구도 감히 이성의 근본요구들(E.4부)거슬러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고, 다른 구성원들에게 질책을 살 것이다.

또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인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명예의 야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성적이 되도록 추동하는 것은 이성적인 욕망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정념적인 명예의 야망이거나 이 야망의 부정적 이면, 곧 수치에 대한 공포다. 여기서 핵심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회의체의 구성이다. 어떠한 국가상태에서든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할 수 있는 풍습을 정착시키고, 그러한 풍습을 촉진시키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성에 근거하고, 이성에 인도되는 국가

스피노자 정치학의 근본 원리는 사람들이 이성을 키울 수 있는 제도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바람직한 통치 형태라 해도 거기에 맞는 제도적 체계의 뒷받침을 받지 않는다면 더 심한 실망만을 낳을 뿐”(마트롱, 599)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코나투스를 확장하고자 하는 개개인들이 정치적 매개를 통해서 코나투스의 방향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최선의 국가 상태는 제도에 억지로 복종하는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목적인 평화란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인격적 힘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덕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정치론>, 5.4)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최선의 국가 상태로 결론짓는 것이 ‘덕’이다. 한니발의 군대를 떠올려보자. 10년이 넘는 전쟁, 그것도 고국 카르타고가 아니라 이역만리 로마에서의 전투에서 어떻게 단 한번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스피노자에게 덕은 역량이자 능력에 다름 아니다.(E.4정의8) 한니발이 사람이 좋았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전쟁에서 보여준 뛰어난 역량 때문이다.[각주:2] 

참으로 덕스러운 행동이란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E.4.24) 유덕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 각자의 코나투스를 확장시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면에서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자연에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E.4.18 주석) 덕 있는 사람은 금욕적이라기보다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확장시키는데 진정으로 성공적이기 때문에 덕이 있는 것이다.


3. 문탁네트워크 정치론

문탁에서도 자연권은 활발발하게 살아있다

문탁은 정치체인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의 관점에서라면 정치체다. 문탁에서 공부하는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코나투스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서 공부하고 활동한다. 보이지 않는 제도이지만 분명히 전체의 코나투스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힘(제도)이 존재한다.

매년말 문탁에서는 새로운 공부와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간다. 저마다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공부를 제안한다. 한 편에서는 몸을 쓰는 활동(공부)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다른 편에서는 강좌를 더 기획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많은 욕망들의 충돌이 발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활동과 공부가 문탁 전체의 코나투스를 높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문탁 전체의 역량이 높아진다는 것은 개개인의 특이성이 높아진다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현재 자누리생활건강, 길쌈방, 파지스쿨과 같은 문탁의 작업장들과 활동들은 각자가 개인의 자연권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고 상호 충돌한 결과이고, 이 자연권이 어느정도 동일한 방향으로 제도화된 결과이다. 출발은 개인의 욕망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활동과 공부는 자신과 문탁 전체를 더욱 더 활동적이게 만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욕망으로 시작한 공부가 지적열망의 충족으로만 끝나면 안된다는 생각에 ‘공부해서 남주자’는 강좌방식을 취하기도 하며, 에세이 발표때는 세미나 회원 이외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자신들과 참석자들 모두에게 건강한 긴장감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동일한 이유에서 얼마전 수년동안 ‘마을경제’에 대해 고민해 온 친구들이 고심해서 자본주의 경제와 다른 담론을 발표했고, 근대의 학교가 아닌 방식에 대해 실험해온 파지스쿨은 2018년을 맞이하면서 ‘마을교육’에 대한 자신들의 고민을 문탁 전체에게 묻기도 한다.

문탁에서 개인의 자연권은 억제되거나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문탁 전체의 활동성과 역량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문탁은 다툼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연권이 활발발하게 드러난다면 코나투스들간의 충돌과 다툼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문탁은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까? 

우선 문탁네트워크는 다툼과 갈등을 피하지 않는다. (물론 피할 수 있는데까지 피한다. ^^) 문탁에서는 “자연 안의 인간을 국가 안의 국가”(E3 서론)처럼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 스스로가 정념적 인간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툼이 발생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문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이 갈등을,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다. 이성적, 정서적인 접근 방법 모두가 필요하다.

우선 갈등은 이성적으로 공공연하게 다뤄져야 한다. 논쟁이나 다툼이 발생했을 때는 숨기거나 의도적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또한 갈등 해결을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활동 단위 혹은 세미나 단위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문제를 다루면서 갈등의 맥락을 함께 공유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러한 공공연함만으로는 문제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정서적인 공감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정념이 발생했을 때 그것과 반대되거나 혹은 더 강한 정념”(E4)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이성적이보다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여기에서 적극적인 편들기는 중요치 않다. 그저 함께 밥을 먹으면서 혹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작은 선물을 통해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갈등은 과거의 정념이고, 지금 함께 하는 대화는 현재적이기에 더 힘이 세다.

갈등은 그 문제의 옳고 그름(선악)을 따지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선악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에 따른 상대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E.4 서론) 어떤 면에서는 그 갈등을 끝까지 밀어부치면서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자신들이 행하고 말한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사건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해서 정념에 휘둘렸음을 알게 된다. 즉 그 사건의 전후 맥락과 끝없이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다툼과 갈등이 없는 공동체는 건강하다기보다는 자유가 막혀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완벽한 정치 체제를 갖추었더라도 그 제도의 실행자들은 여전히 정념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장일치와 덕의 문제

앞서 제기했던 스피노자 강좌 사례를 다시 이야기해보자. 강좌의 주제가 바뀐 것에 대해서 문탁 내부에서 이의 제기가 없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먼저, 문탁에서의 논의는 언제나 만장일치다. 논의는 실행될 때까지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글쓰기강학원팀에서 논의했다는 것은 1차적인 결정일 뿐이고, 처음 논의했던 사람이 없더라도 논의는 계속되고 결과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언제라도 결정은 유보되거나 바뀔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야 한다.

사실 문탁의 만장일치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회의가 아니다. 2~3시간밖에 되지 않는 회의에서 만장일치가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대부분의 회의는  안건을 공유하는 자리이고, 안건이 얼마나 공유되었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만약 안건에 대한 전체적 공감이 불충분하다면 결정은 다음으로 미뤄진다. 공감을 위한 실제적인 (비공식적) 논의는 회의가 끝난 후에 일어난다. 

문탁의 의사결정에서 (공식적인) 회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미나이고 활동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세미나에서 공부한 것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활동에서의 공통감각을 바탕으로 교류된다. 다시 말해, 회의에서 안건이 던져지면 각자의 세미나에서 공부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이층카페’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고, 생산을 하면서도 대화는 이어진다. 여기서 관건은 이 대화가 끈적끈적한 사적 대화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문제이고, 대화가 공공연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뒷담화가 아니라) 점이다.

이런 방식의 대화가 여기 저기서 이뤄지다보면 안건에 대한 전체적인 공유가 일어난다. 자연스럽게 왜 이런 안건이 제안되었는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전 작업들이 일어나고 다음 회의에서 만났을때 우리는 안건을 처리할 수 있다. 완벽한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정서적 공감이 충분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안건에 대해서 모두가 소외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로 덕의 문제를 살펴봐야한다. 스피노자에게 덕이란 역량이라고 했는데, 이는 코나투스의 효과로 나타나는 변용능력이다. 변용능력이란 개체가 외부의 물체에 영향을 주거나, 외적인 원인들에 의한 변화에도 개체의 코나투스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각주:3]변용능력이 크다는 말은 개체의 존재역량이 확장되었다는 뜻이고 외부 자극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개체는 그 개체만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위 사물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변용능력으로서의 덕이란 주변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덕이 관계역량이라면 공동체에서 유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전체적인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수의 몇 사람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것이 맞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역량이란 것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역량이 소수의 몇명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다면 그 공동체 역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표도 없고 조직표도 없다는 말은 구성원 개개인의 자발성이 문탁 전체의 동력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조 :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공부하는 것은 문탁의 운영원리를 이해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 문탁의 정치는 분명 다른 곳과 다르다. 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문탁의 정치가 굉장히 ‘여성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남자, 여자가 아니라 여성적 정치형태라는 것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산업사회를 지배해온 남성 중심의, 이분법적인, 위계적인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권력형태가 문탁에서 형성되어 동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탁에 처음 온 사람들 혹은 어느정도 이곳에서 공부하더라도 기존의 권력형태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문탁의 운영원리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2017. 12월

  1. 알렉상드로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린비, p19 [본문으로]
  2. 한니발은 이제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 즉 직선로인 해상이 아니라 육로로 알프스 산맥을 건너서 로마를 공격했고, 기병을 위주로 하는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로마를 무너뜨릴 뻔 했다.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1>, 11장 참고) [본문으로]
  3. 개체로서의 코나투스가 있고, 더 큰 복합개체로서의 코나투스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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