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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혹은 진실

by 홍차영차 2018. 6. 16.

신화와 진실

- 비극에서 플라톤의 법정 드라마로 -






우리는 언제부터 신화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

이미 오래 전부터 신화나 전설은 동화 속에 나오는 허구로 간주되었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와 산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변화는 과학의 진보나 발전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이다. 사실 허구란 진실의 대립물이 아니라 진실의 부산물이다.

한 사회에서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협잡물이나 무모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진실’이라는 단어는 복수적으로 쓰여야 마땅한 동음이의어이다. 세상에는 동일한 진실이 아닌, 이질적인 진실 프로그램들이 존재할 뿐이다. 진실이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트로이아 전쟁, 아르고호의 원정과 같은 전설들이 거의 모두 진정한 것으로 통했다. 또한 동시에 그들 역시 <일리아스>의 세계는 신들과 인간들이 설화의 시간성 안에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허구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세계가 그 자체로서 허구일 수는 없다. 허구성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다. 현실과 허구의 차이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현재 아무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상대성 이론은 연역적이고 양자화된 물리학이라는 하나의 진실 프로그램 안에서 진실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믿는다면 이것은 신화적 프로그램 안에서 그에 못지 않게 진실일 수 있다. 



그리스 고전 공부를 시작한 지 4년만에 떠났던 그리스 여행.

포세이돈 신전에서 바라본 석양은 그들이 믿었던 신화가 결코 '무'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했다. 



신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

어떤 사실을 허구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 분명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부질없는 우화일지 모르지만 그 합은 제로가 아니다.

말은 현실의 거울이다. 특히 그리스인들에게 말이란 신화와 시를 비롯한 모든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란 무엇이란 말인가? 말이 거울이라면 어떻게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반영할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다. 무를 반영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반영하지 않는 것이고, 안개를 반영한다는 것은 혼란스럽게 반영한다는 뜻이다. 대상이 어지러우면 거울 또한 그렇다. 그리스인들인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신화에 대해 가졌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고대인들 역시 신화에 거짓말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헤라클레스가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평정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는 사실을 믿는다. 만약 헤라클레스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기원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분명히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통해서 영웅 시대에 신들이 인간들과 섞이는 혼거상을 보여 주지만, 또한 영웅 시대는 지나갔으며 현재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암암리에 인정했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인들은 믿지만 믿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는 베이스가 되었다. 고대인들이 가졌던 진실의 감정은 매우 폭넓은 것이었다. 그것은 쉽게 신화를 포괄할 뿐 아니라 모든 허구 문학까지도 감싸안는다.



새로운 신화와 플라톤의 철학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을까? 또한 플라톤이 시인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체(국가)’에서 추방해야하다고 말했던 철학체계는 그리스 신화와 다른 것인가? 대답에 앞서 우선 ‘믿음’이라 말하는 대신 ‘진실’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곧 상상적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진실은 결코 단순한 사실적 경험이 아니며, 모든 경험들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것이다.

현실에는 모순된 진실이 있는게 아니라 각기 다른 진실과 다른 이해관계의 진실 프로그램이 있을 뿐이다. 진실과 이해관계는 단지 우연적인 서로 다른 프로그램들에 의해 공동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현실은 그렇게 구성되어진다. 믿음의 복수성은 실제로 진실 기준의 복수성이다. 진실은 상상력의 딸이고, 현실이란 우리 인류가 지닌 구성적 상상력의 딸이다.

신화를 거부하려면 더 용의주도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에피스테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사물 자체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진실은 우리에게 내재적인 것도 아니다. 진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진실이 영원히 잠정적이므로 내일 당장 허위로 밝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한 가지 진실이 있다면 ‘진실이 변한다’는 것이다.

상상력의 궁전들은 공간안에 세워지는 게 아니다. 그것들이 곧 활용 가능한 유일한 공간이 된다. 궁전이 존재하고, 그것과 더불어 어떤 사물의 질서가 존재하기 시작하고, 따라서 이 질서에 대해 무언가 얘기할 꺼리가 생기게 된다. 세상의 밤중에는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다. 다른 조명보다 더 진실된 것도 그릇된 것도 아닌 하나의 조명을 받고서 어떤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이 시도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플라톤은 시인들을 비판했지만, 그리스 비극에, 특히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플라톤은 기존의 신화적 방식이 아니라 철학이라는새로운 신화를 쓰기로 했다. 플라톤의 철학은 이전의 그리스 비극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대화logos라는 방식으로 그려낸 새로운 법정 드라마이고, 현실에 저항했던 살아있는 시도였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사실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어떤 진실 프로그램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현실을 막막함과 답답함을 넘어설 수 있는 보여줄 새로운 신화를 구성하는 것일지 모른다.



2018.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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