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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민주주의와 영웅 2 - 페리클레스

by 홍차영차 2017. 2. 25.

민주주의가 좋아하는 영웅?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


페리클레스에 대해 플루타르코스가 지적한 단점은 오직 하나, 머리가 길다는 것! 어쩌면 페리클레스에게 쏟아진 그 모든 찬사들은 플루타르코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자신의 도시 아테나이를 위해 여러가지 민주적인 조치들을 마무리하면서 시민들에게 “물 타지 않은 자유”를 따라 주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대중과 소통하는 정치인, 장군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뛰어난 군주’처럼 보인다.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자신이 살고 있던 황제 시대에 딱 알맞는 인물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아테나이 황제, 페리클레스

트레이너가 운동선수를 가르치듯 페리클레스는 어려서부터 다몬에게서 정치를 배웠다. 또한 그는 클레조메나이의 아낙사고라스와 친하게 지내며 그에게서 탁월한 통찰력을 배웠다. 그는 젊을 때 민중을 몹시 경계했는데, 자신의 외모와 재능이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참주와 닮은 외모조차도 위험이 되었던 것. 특히 아스파시아라는 여인이 그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녀는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밀레토스 출신이었는데 소크라테스도 가끔 제자들을 데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테이데스, 테미스토클레스가 추방당하자 그는 본성상 민주주의자가 아닌데도 소수의 부자들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정치에 참여했다. 그의 생활방식은 매우 단순했고,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도 엮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시민들은 그가 시내에서 오직 광장과 시청으로 걸어가는 모습만 볼 수 있었고, 그는 어떤 저녁 식사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즐거운 모임은 모두 포기했다. 왜냐하면 격의 없이 어울리다 보면 위엄을 지키기가 쉽지 않고, 체면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중과 지속적인 접촉은 피했지만 이따금씩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원대한 이상에 맞게 자신의 생활방식을 조율했고,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활용하여 자신의 수사학을 도왔다. 사람들은 그를 ‘올륌포스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한 페리클레스의 모습은 마치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처럼 보인다. 투퀴디데스가 기술했던 것처럼, 당시의 아테나이 정치는 ‘이름만 민주정치지 실제로는 제일인자의 정부’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대중은 독재자를 좋아해

페리클레스는 축제를 참가할 때도 지원금을 주었으며, 공공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배심원 제도에도 수당을 주었다. 한 마디로 그는 공적자금을 통해서 대중을 이끌었다. 그는 이렇게 대중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그의 이상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키몬, 투퀴디데스)을 추방해버렸다. 물론 이런 권력으로 그가 행했던 것은 시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권력(?)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그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전쟁을 하러 나가도 수당을 주고, 아테나이 도시 내에 머물고 있어도 델로스 동맹국들로부터 들어온 금은보화가 넘쳐나기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 문화의 가장 큰 경탄이자 헬라스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신전들의 건축이었다. 건축 경기를 부양시키면서 도시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한 방식 역시 자신의 정치 스타일과 비슷하다. 사업의 총감독으로 자신이 신임하는 페이디아스를 놓고, 그로 하여금 거의 모든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이런 모습에 대해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와 페이디아스에 대한 질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테미스토클레스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점잖치 못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모략하여 대중의 질시라는 악령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  역사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독재자 페리클레스

모든 정적들을 처단하고, 권력을 손에 잡은 뒤 페리클레스는 달라졌다.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더이상 민중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변덕스러운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때로 대중이 그의 정책에 분개할 때면 고삐를 죄며 유일한 일을 하도록 그들을 강요했다. “마치 현명한 의사가 복잡한 만성병 환자에게 때로는 무해한 쾌락을 처방하고 때로는 쓰지만 효험 있는 치료제를 처방하는 것”처럼. 그는 희망과 두렴움이라는 두 개의 키를 가지고 대중들을 다뤘는데, 그들이 오만할 때는 제동을 걸고 의기소침할 때는 북돋워주곤 했다.

그는 점점 더 강력해진 아테나이의 실정에 맞추어 라케다이몬과의 관계를 제어했다. 라케다이몬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모스와의 전투, 메가라인들에 대한 제재 조치를 보면 라케다이몬과의 전쟁을 좀 더 미뤄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은 힘이 세진 아테나이에게 불가피한 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시기는 분명 페리클레스가 정했던 것 같다.

페이디아스는 감옥으로 끌려가 병사했고, 아낙사고라스는 불경죄로 추방당했다. 게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스파시아 역시 불경죄로 죽음 위험에 처해 있었다. 국가적 중대사 혹은 큰 위험이 그에게 필요했다. 바로 전쟁!


제국시대의 영웅의 조건

페리클레스는 어떤 것에도 끄적하지 않고 모욕과 적대감을 침묵으로 참아내면서 살아왔다. 역병에 자신의 누이와 대부분의 친구를 잃었을 때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항상 평소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위대한 정신을 견지하려 했다. 한 마디로 그의 성격은 자애롭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생활이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수많은 업무와 주의의 심한 적대감 속에서 합리성을 가졌으며, 고결한 정신을 유지했다. 이런 모습때문에 아테나이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를 참을 수 있었던 것인가.

대중을 마음을 유혹하고 선동하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던 페리클레스. 물론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주도면밀하고, 도덕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몇몇의 인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인물들조차도 대부분은 페리클레스처럼 몽매한 우중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통제해야만 했다.

민주주의가 참을 수 있는 영웅은 앞뒤가 다른 모습이어야만 할까?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리클레스가 플루타르코스의 눈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황제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로마 황제 시대가 정착된 시기에 더 이상 전쟁터를 지휘하던 ‘현장’형 영웅이 아니라 제국을 다스릴 ‘전략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해석하든 두 영웅전을 결론은 한 가지인듯 하다. “민주주의가 참을 수 있는 있는 영웅은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닐까.


201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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