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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민주주의와 영웅 1 - 테미스토클레스

by 홍차영차 2017. 2. 21.

민주주의는 영웅을 참아낼 수 없나?

-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459년) -



페르시아 전쟁하면 살라미스 해전이 떠오고, 그 살라미스 해전을 가능케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니였다면 라우레이온 은광의 돈은 200척의 삼단 노선이 아니라 그저 개인들의 쌈지돈이 되었을 것이고, 그가 아니었다면 그리스 연합군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가 아니라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는 이스트모스 지역에서 참혹한 패배를 맞보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가 전해주는 테미스토클레스는 <테미스토클레스전> 초반부에서부터 영웅이 아닌 ‘명예욕’에 가득찬 인물로 나온다. 고결하다기도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으로. ‘큰 그림을 보는 눈’은 일을 크게 벌리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실천적 지식과 정치적 재능’은 이론에 대한 냉담으로 표현된다. 왜?




플루타르코스의 시선 혹은 로마의 시선?

그는 한미한 출신이었다. 스파르타의 뤼쿠르고스처럼 오랜 전통의 가문도 아니었고, 페리클레스처럼 아테나이의 민주주의 전통을 이뤄낸 조상도 없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분명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과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모습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는 당연히 도시의 ‘실력자들’과 ‘일인자들’과 맞서야 하지 않았을까? 왜 이런 그의 모습이 플루타르코스에게 (혹은 로마 사람들에게) ‘일일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보였을까? 제물을 바치며 더 많은 사람과 부를 나누는 모습조차도 ‘금전욕’이 강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야심 많은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마라톤 전투에서 밀티아데스의 전승 기념비가 세워진 뒤 그는 잠을 잘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더 큰 싸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테나이인들에게 200척의 삼단노선을 준비하도록 제안한 것이다. 항상 그는 그는 자신과 아테나이를 위한 일들을 제안하고, 성공시켰다. 하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비난뿐이었다. 이런! 육군이 아닌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니, “아테나이의 백성들을 노 젓는 의자와 노로 강등했다”고까지 비난했다. 기존의 그리스와 아테나이 전통(육군)을 버리고 새로운 초석(해군)으로 나아가자는 그의 주장이 조금은 과격하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기득권층에게 위협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비난과 묘사를 당연하다고 봐야할까? 누구의 시선으로 이해해야 할까?


위대한(?) 업적으로 추방당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들의 도시를 버리고 대부분의 아테나인들을 트로이젠으로 보내면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것도 계속되는 그리스 연합군의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을 바로잡으면서. 또한 연합군은 분명히 해전을 함께 하자고 결의했지만, 바로 앞에 페르시아의 해군과 육군이 나타나자 바로 철수하려고 했다. 그는 정치가이자 군인의 재능을 양면으로 드러내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뿐 아니다. 마라톤 전투에 이어서 바로 해군력의 필요성을 간파했듯이, 그는 살라미스 해전이 끝나자 마자 바로 그리스 내전을 예상했다. 지체없이 아테나이를 재건하고, 특히 아테나이 주변의 ‘요새화’를 주장했다. 그렇게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그의 모습을 “천성적으로 명예심이 강하다”고 묘사했지만, 그는 라케다이몬에 직접 가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테나이의 성벽을 완성시켰던 인물이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 전체의 연합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라케다이몬과 대립점에 있는 하지만 힘이 있는 도시들-테바이, 아르고스-를 델로스 동맹에 포함시켰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이 정도면 테미스토클레스 자신 뿐 아니라 후대까지도 특권을 부여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후 그가 받아야만 했던 것은 동료 시민들의 중상모략과 도편추방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전>의 마지막에 다시 나오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 마지막을 적국인 페르시아에서 보내야했지만 자신이 가졌던 고결함을 끝까지 지켰다. 페르시아와 아테나이와의 전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영웅과 민주주의

테미스토클레스가 활약한 기원전 5세기 초는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형태를 갖춰가는 시기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 힙피아스로 이어진 50년이 넘는 오랜 참주정치가 막을 내렸다. 특히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기원전 6세기 말에 성공리에 추진되면서, 아테나이의 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힘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이제 누구도 뛰어난 소수의 인물들이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분명 그리스를 구원하고 아테나이를 일으켰지만, 그는 위험해보였다. 아니 더 이상 이런 지도 ‘스타일’을 민주주의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가 문제일까 아니면 아테나이 시민들이 문제였을까? 대중들은 언제나 영웅에게 아테나이 시민들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가졌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아테나이인들은 영웅을 플라타너스 취급한다. 날씨가 궃으면 가지 밑으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기만 하면 가지를 쳐 자라지 못하게 한다.” 21세기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민주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영웅은 불가능할 것일까.


201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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