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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by 홍차영차 2017. 1. 7.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이지 않는 고귀함과 보이는 영리함

그리스 문화의 최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전성기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인 기원전 460~430년을 꼽는다. 이 시기에 파르테논 신전이 지어졌으며, 페이디아스의 아름다운 조각들이 만들어졌고, 수 많은 그리스 비극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역사>에 나타난 페르시아 전쟁사를 읽고 있노라면 그리스의 탁월함arete과 자부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시기는 살라미스 해전이 있었던 기원전 480년 전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 낮의 기온이 가장 높이 올라갈 때는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가 아니다. 가장 높은 곳을 조금 지나간 후에야 그 열기가 대지를 뜨겁게 달군다. 이처럼 그리스 아테나이가 페리클레스 시대에 보여준 보여준 문화, 예술, 정치, 경제의 모습은 바로 그리스의 탁월함이 최고조를 어느정도 지나서 대지를 달구는 시간이 흐른 뒤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서 기원전 6세기 초(기원전 594년)에 이루어진 솔론의 개혁과 6세기 말(기원전 508년)의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주의 개혁으로 그리스 아테나이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의 방식으로서 탁월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져진 힘은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서 드러났다. 실상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그리스의 탁월함은 그들의 생활 모습 속에서, 삶의 방식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자신들의 탁월성를 보여주기 위해 따로 신전과 조각, 그림, 비극 공연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서구 문화가 지금까지 그렇게 자랑하는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실상 점점 더 왜소해져가는 자신들의 탁월성을 보이는 것으로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일수도 있다. 아테나이 공동체의 삶 자체가 자신들의 탁월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굳이 탁월함의 표상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 전역의 시민들은 그들의 용감한 선택과 행위를 보면서 아테나이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첫번째 추모식에서 했던 “아테나이는 헬라스의 학교”라는 말은 실상 페르시아 전쟁 시대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살라미스 해전, 탁월성의 정점頂點을 찍다

100여년 넘는 시간동안 (정치 개혁을 통해) 축적된 아테나이의 탁월성은 페르시아 전쟁라는 최대의 위기에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탁월성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대한 정의를 논하면서 정신의 크기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즉 탁월성, 고귀함이란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비극은 크기를 가진 고귀하고 완전한 행동의 모방으로서,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6장)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행동의 모방(mimesis)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일정한 크기를 가진” 행동! 그런데 여기에서 ‘크기’는 정신의 키 즉 정신의 크기와 위대함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크기를 가진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은 탁월하고 고귀한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탁월성, 고귀한 정신의 크기를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정신의 위대함은 오직 한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즉 자기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저항에 굴복하게 될때, 그것이 한계가 된다. 그리고 고귀한 정신은 저항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앞의 저항을 초월해간다. 다시 말해 스스로가 어떤 장애물에 의해서도 한계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정신의 크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 제거될 수 있는 장애물은 결코 정신의 크기를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정신의 영리함을 증거할 뿐이다[각주:1]. 오직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만이 정신의 크기의 잣대가 될 수 있다.

정신의 크기와 위대함은 자기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고통의 크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어떤 정신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것의 가치의 크기도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들 가운데서도 최종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이 무엇일까? 바로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죽음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정신의 크기를 검증하는 마지막 장애물이 된다. 신들은 그런 의미에서 참된 의미의 영웅적인 위대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고통받을 수 있는 ‘필멸의 인간’만이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렇게 말하자(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자) 코린토스의 아데이만토스가 또 다시 항의하며, 나라없는 자는 잠자고 있으라고 요구했고, 에우뤼비아데스가 나라 없는 자를 표결에 참여시키는 것을 제지하려 했다. …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가 그와 코린토스인들을 싸잡아 매도하며, 아테나이인들은 아직도 200척의 함선에 선원들을 배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나라보다 더 큰 도시와 나라를 갖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아테나이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헬라스의 국가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다시 에우뤼비아데스를 향해 더 힘주어 말했다. “그대가 이곳에 머물러 남아가 되어준다면 잘 풀릴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헬라스를 완전히 망하게 할 것이오. 이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함대에 달려 있소. 그대는 내가 권하는 대로 하시오. 그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가족들을 모은 다음 배에 태우고 이탈리아의 시리스로 갈 것이오. (<역사>, 8권, 61, 62)


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한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려는’ 도시 국가 아테나이의 탁월성을 최고조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인들에게 불바다가 된 상황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처럼 그들은 이탈리아로 가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한도 끝도 없어보이는 페르시아 군대의 행렬에 맞선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하지만 도시국가 아테나이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을 마주선 아킬레우스처럼 아테나이는 온 존재를 걸고 죽음을 향해 돌진해갔다.[각주:2] 그리고 그들은 기적같은 승리를 쟁취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신들이 도왔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우리 아테나이인들과 전 헬라스가 구름처럼 몰려온 침략자들을 물리친 것은 실로 요행이었소. 그러니 우리는 도망치는 그들을 더는 추격하지 맙시다. 이런 위업을 달성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한 인간이, 그것도 불경한 무법자가 아시아와 에우로페를 동시에 통치하는 것을 시기하신 신들과 영웅들이었소. (<역사>, 8권, 109)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테나이는 2류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두 번째 자리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스 전체 총사령관은 당연하게 스파르테의 차지였고, 한 쪽 날개를 담당하는 것도 확실치 않았다.[각주:3]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아테나이의 군사적 위치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패를 가른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돌아갔지만, 30만의 대군을 마르도니오스에게 맡겼다. 그리고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나이를 두 번째 불태우고[각주:4] 플라타이아이에서 전투(기원전 479년)를 준비했다. 분명히 아테나이인들은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에서 플라타이아이인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페르시아인들을 격파했다.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에서는 ‘자신들의 목숨과 모든 재산(전 존재)’을 바쳐서 승리를 쟁취해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테나이의 정치적 지위는 인정되지 않았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도 한 쪽 날개를 누가 담당할 것인지 테게아인들과 설전을 벌여야 했다. 양쪽 모두가 최근의 업적과 지난날의 업적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도 양편은 모두 라케다이몬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했고, 결국 라케다이몬들은 아테나이인들을 선택했다.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나이인들이 보여준 용맹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라케다이몬인들이여, 그대들이 우리를 어디에 배치하여 적국의 어느 부대와 맞서게 하기로 결정하든 우리는 기꺼이 그대들의 명령에 따를 것이오. 우리는 어디에 배치되든 최선을 다할 것이오. 그대들이 명령을 내리시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복종할 것이오.”

아테나이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아르카디아인들보다는 아테나이인들이 날개를 맡을 자격이 있다는 고함 소리가 라케다이몬인들의 전 진영에서 들려왔다. 그리하여 아테나이인들이 테게아인들을 이기고 날개를 맡게 되었다. (<역사>, 9권, 27, 28)




시들어가는 꽃에 분홍분을 바르다

<역사>에 나타났던 아테나이의 탁월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1, 2권을 통해 드러난 주변 국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쉽게 파악된다. 전쟁이 임박한 순간에 아무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도시들과 개인들은 라케다이몬인들을 해방자로 여겼다. 아테나이인들 스스로도 이제는 그들을 동맹국의 리더가 아니라 제국의 중심으로 인정했고 다른 도시 국가들의 약탈과 탄압 없이는 아테나이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헬라스인들의 여론은 라케다이몬인들 편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이 헬라스의 해방자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도시든 저마다 말과 행동으로 어떻게든 라케다이몬인들을 도와주고 싶어했으며, 모두들 자기가 관여하지 않으면 일이 잘못되리라고 생각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8)

우리는 제국을 잃을 수도 있으며, 그리고 나면 제국을 통치하면서 미움을 샀으니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져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서 제국을 포기하는 것을 고상한 행동이라고 여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제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제국은 이제 참주정체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시작한 것은 나빴을지 모르지만, 그만두자니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8)


아테나이가 처음부터 ‘제국’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아테나이인들은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의 실정으로 델로스 동맹의 통수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맹국가들은 델로스 동맹을 유지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함선과 선원들이 아닌 금전을 제공하고자 했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돈이 아테나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1시민 페리클레스로 대표되는 기원전 460~430년의 아테나이는 이 돈으로 신전을 지었고, 거리 거리마다 조각상을 세웠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들이 돈을 받고 민회와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스스로가 결정하고 책임지는 직접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아테나이인들은 이렇게 통수권을 넘겨받았고, 동맹국들은 파우사니아스를 향한 증오심에서 기꺼이 이에 동의했다. 그러자 그들은 대페르시아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어떤 도시들이 금전을 제공하고 어떤 도시들이 함선을 제공해야 하는지 결정했는데, 페르시아 왕의 영토를 약탈함으로써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받는다는 명분을 세웠다.

이때 처음으로 ‘헬라스의 공공기금 재무관들’이라는 관직이 아테나이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공물을 수납하는 것이 그들이 소관이었는데, 공물이란 금전적 기여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 책정된 공물은 460탈란톤이었다. 금고의 위치는 델로스 섬으로 정해졌고, 동맹국의 회합은 그곳 신전에서 개최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95~96)


페리클레스가 아무리 “우리 도시 전체가 헬라스의 학교”라고 외쳐도 이는 죽어있는 나무에 물을 뿌리는 것이고, 시들어가는 꽃잎에 분홍분을 바르는 것에 불과했다.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감동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뜨거워진 마음은 뒤돌자마자 금방 식어갔다. 마치 알키비아데스가 거의 평생동안 재산, 명예, 권력, 가문으로 뒤덮힌 자신의 모습때문에, 네온사인처럼 현란한 그의 외적인 환경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기원전 5세기의 아테나이는 신전과 조각상으로 치장된 외적 모습 때문에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고귀함을 기준으로 삼는) 훌륭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아테나이의 재건

 이렇게 탁월성의 관점을 따라서 아테나이의 역사를 보게 되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기원전469~399)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에 성장했고, 참혹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직접 참가하면서 철학자로서의 소명을 발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나오는 포테이다이아 전투에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참가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소크라테스가 구해주기도. 하지만 이 전쟁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소크라테스의 각성에 있다. 종교와 전투 이외에 아테나이를 단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던 소크라테스. 분명 처음에 소크라테스는 도시국가 아테나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전쟁이 오래될수록 참혹해지는 상황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전쟁에 함께 참여한 동료들은 전투에서 죽어나가고, 새롭게 투입된 군대에서는 역병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시체들이 쌓이고 있었다. 또한 이겨야 할이긴 하지만 포테이다이아인들을 포위하고 그들을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하면서, ‘인육’을 먹게 만들고 있는 전투. 무엇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아킬레우스에게 비유했던 것은 단지 '목숨을 걸면서 조국'을 위해서 죽어갔다는 사실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적 인간들에게서 전쟁은 삶과 구분되지 않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것처럼 그들에게 전투 역시 평화와 다름 없는 삶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크라테스가 맞닥뜨리고 있는 전투의 모습은 이와 너무도 다르다. 오로지 죽이기 위해서, 아테나이 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던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에서 소크라테스는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덕,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너 자신을 알려는 경구를 가지고 자기 배려의 철학을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는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정말 스스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는 아테나이 시민들과 도시 국가 아테나이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고귀함을 기준으로 삼는 훌륭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도시 국가 아테나이를 재건하려고 시도했다.






  1. 이 말은 <공부론>에서 김영민이 묘사하고 있는 ‘영리한 사람’과 ‘현명한 인간’ 혹은 ‘변덕’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즉 “영리한 인간은 그 근본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명한 인간’이란 이미,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공부의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이다.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 영리한 인간들은 학같은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솜씨 있게, 날름날름 물고기들을 쪼아 먹는다. … 그러나 현명한 인간, 혹은 공부하(려)는 인간은 물속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잠근 탓으로 혹간 몸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아가미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김영민, <공부론>, 샘터 pp23~29) [본문으로]
  2. 스파르테의 정신으로 불리는 kallos thanatos(아름다운 죽음)은 ‘죽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역사> 9권, 71에서 아리스토데모스가 죽기를 원했다 하여 아무 명예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그 정신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3.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에 따르면 그리스 전체의 리더쉽은 아르고스(아가멤논)에 있었다. 하지만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자신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죽고, 그 후손들 모두가 죽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 제1도시의 위치가 라케다이몬이 되었고, 아르고스와 라케다이몬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봐야할 듯. ^^ [본문으로]
  4. 아테나이가 첫 번째로 불탄 것은 살라미스 해전이 있기 전에 크세르크세스에 의해 테르모퓔레 전투 패배 이후에 이루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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