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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의식과 물질

by 홍차영차 2016. 11. 24.

의식과 물질

<독일이데올로기>



맑스는 모든 인간의 실존 및 역사가 만들어지기 위한 4가지 전제를 고찰한다. 첫째 인간은 살 수 있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먹을 것, 마실 것, 집과 옷이 필요하다는 것. 즉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최초의 역사적 행위이다. 둘째, 인간은 지속해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한다. 이미 충족된 욕구는 새로운 욕구들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역사적 행위가 된다. 세번째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만드는 인간은 다른 인간을 만들고 번식시킨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생산양식은 언제나 특정한 협업 혹은 사회발전 단계와 결합되어 있다.

네 가지 근원적인, 역사적인 네 측면을 살펴본 뒤 맑스는 인간이 ‘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드러나는 것을 생활수단의 생산이라고 봤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의식’의 발견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묶여’ 있다는 멍에를 짊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물질이란 진동하는 공기층, 음성, 요컨대 ‘언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특히 언어란 의식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언어는 실천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며, 무릇 인간이 존속하는 한 영속적으로 존재한다.

(근대에서 말하는) 개별적 의식, 정신, 자아는 원래부터 있었던 순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절대적 집단의식에서부터 발생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함께 살아가야 했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집단과 다른 집단이 구분되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발생한다. 한 집단은 자신들의 토템을 가질 것이고 이런 토템을 중심으로 부족만의 고유한 의식이 발생한다. 이런 부족에서 지금과 같은 개인은 없다. 그들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소유하고 함께 의식한다.

하지만 부족의식, 집단의식이 점점 강화될 때 집단의 구성원은 집단의식이 자신을 강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개인의 의식, 정신이 발생한다. 한 개인의 자아라는 것은 사회적 관계로서 형성되는 것이지 관념적인 세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념들, 표상들, 의식 등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물질적 활동과 물질적 교류 속에, 현실적 생활의 언어 속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맑스가 역사적인 네 측면을 살펴본 후 의식 ‘발견’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축약해서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말했을 것이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실현으로서 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이는 맑스에게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맑스에게 정신이란 물질적 토대 위헤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분명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물질적, 감성적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포이에르 바하는 인간을 유적 존재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을 살아숨쉬는, 현실 속에서 활동하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보지 못했다. 다만 ‘인간이란 그가 먹은 것’이다는 말처럼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분명 <독일이데올로기>에서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 차이>나 <헤겔법철학비판>처럼 ‘가면’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맑스는 분명 이 시기에서 실천으로서의 철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처럼 비록 그들의 지배가 모든 낡은 사회 형태 전체와 지배 일반의 폐지의 조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다시 보편적인것-정치적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최초의 순간에는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으로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재설정되어야 한다. 맑스가 예상했던 수많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났고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가 이루어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아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비판가로서도 되지 않는 일’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1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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