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맑스

관료제와 군대로 이루어진 부르주아지 국가의 성립

by 홍차영차 2016. 11. 23.

관료제와 군대로 이루어진 부르주아지 국가의 성립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네르 18일> -



맑스는 스스로가 제2판 서문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범하고도 우스꽝스러운 한 인물이 주인공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정세와 상황이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에 의해 어떻게 창출되었는가를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브뤼메르 18>일을 다 읽고나면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결코 ‘평범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현실적 정치감각을 타고난 정치적 동물처럼 보인다. 강자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이 되었을 때는 가차 없이 적들을 물리쳐 버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여우)이 부르주아파와 프롤레타리아들(맹수들)의 투쟁 속에서 대통령을 넘어 황제에 등극했다. 역사상으로 보면 루이 보나파르트가 황제로서 프랑스를 지배한 기간은 그의 삼촌인 나폴레옹보다 더 오랜 기간이었다. 그러면 맑스는 어째서 한 편으로 너무나 영리했던 ‘루이 보나파르트’를 아무것도 아닌 인물처럼 그려냈을까.

맑스가 <브뤼메르 18일>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그의 말대로 당시의 ‘정세와 상황’이었다. 또한 그가 이러한 정세와 상황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바는 군대와 관료제료 요약되는 ‘부르주아지 국가’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맑스는 분명 <브뤼메르 18일>에서 1848.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의 기간동안 벌어진 드라마틱한 정치 판도의 변화를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그려냈다. 처음에는 혁명의 주인공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당파가 부르주아 공화파에, 부르주아 공화파는 질서파에 버림받는다. 이제 승리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질서파도 무장력을 손에 쥔 아무것도 아닌 자, 보나파르트에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변화무쌍한 정치상황에서 변치않고 점점 더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탑이 있었다. 누가 정권을 잡든 모두가 이 탑을 쌓는데 힘을 기울렸다. 바로 관료제라는 탑!

프랑스 혁명 초기 분할지 소유는 인민의 해방과 부유화를 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점점 더 개개인들을 억압하고 빈곤하게 만드는 법칙이 되어 버렸다. 현대 사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국가적 중앙 집권은 봉건제와의 대립 속에서 점점 더 단련되면서 군사적, 관료적 통치 기구의 폐허 속에서 성립했다. 점점 더 자본화된 사회에서 누가 정권을 잡고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성립되었을 것만 같은 관료와 군대는 사실상 ‘자본’의 시녀 노릇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지의 형성은 사실상 근대 국가 형성과 다름 없었다. 국가는 “사적 소유의 질서 유지”를 위한 최고의 체제일 뿐이다. 국가는 매번 다른 화장으로 ‘자본’이라는 맨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Q1. 맑스는 1848. 6월 봉기의 패배를 언급하면서, 이 패배는 “유럽에서의 부르주아 공화제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무제한적 전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맑스는 갑자기 미국의 계급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은 예외적이라고 말한다. “낡은 문명국들에서는 광화제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변혁 형태일뿐이지 예컨대 미국에서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보수적 생활형태가 아니다.”(선집2권, p296) 맑스가 미국의 사례를 들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Q2. (세미나 시간에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맑스는 6월 봉기의 실패 이후에 일어난 프롤레타리아트의 “교환은행 및 노동자 협동조합”에 대해 공론적인 실험에 대해 폄하했다. 맑스가 이렇게 이렇게 말한 근거는 무엇인가? “필연적으로 좌초하기 마련”이라고 말한 이런 부분들이 끝까지 이뤄진다면 진짜 혁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선집2권, p296)


16.11.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