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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훌륭함은 배울 수 있는 것인가

by 홍차영차 2014. 5. 9.



메논 : '미덕(훌륭함)'은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플라톤의 메논은 미덕, 훌륭함(arete, virtue)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는 텟살리아 출신의 귀족 청년 메논이 미덕은 배울 수 있는 것이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의 세 가지 단계를 통해서 메논 스스로 미덕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미덕의 본질은 무엇인지, 배움이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과 바른 의견의 차이.


 

1. 훌륭함의 본질

소크라테스는 미덕이 배울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전에 미덕이란 무언인가에 대해 메논에게 그 정의를 묻는다. 메논은 미덕이란 상황에 따라서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고 대답한다. 즉 우리 각자의 직업, 성별, 나이, 업무에 다르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벌의 종류가 있지만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성이 있고, 남녀 상관없이 건강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미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미덕 속에 들어있는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메논은 상황에 따른 다양한 것으로 미덕을 정의하려고 한 이후에, 지배하는 능력, 좋은 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으로 미덕을 정의하려고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다만 소크라테스와의 문답을 통해서 미덕에 대한 자신의 정의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하고, 자신이 예전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당황해 한다.

메논은 이렇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소크라테스를 전기가오리로 비유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메논이 주장하는 대로 자신은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 남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이 누구보다도 어리둥절해 하기에 남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함께 미덕이 무엇인지 고찰하고 탐구하기를 청한다.

 

2. 배움도 지식도 상기(想起)

메논은 소크라테스 자신 역시 미덕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에 불평을 하면서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Meno’s Paradox)을 펼친다. 메논의 역설로 알려진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사람은 아는 것은 이미 알고 있어 탐구할 필요가 없기에 탐구하지 않을 것이고, 모르는 것은 자기가 탐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탐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메논의 역설에 대한 대답으로 소크라테스는 상기(想起)를 주장한다.

혼은 불멸할뿐더러 거듭 태어나서 이 세상의 것이든 저승의 것이든 모든 것을 다 보았기에 혼이 배우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한 가지를 상기한-사람들은 이것을 배움이라고 부름-사람이 다른 것도 모두 자력으로 찾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탐구와 배움은 사실은 상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메논의 노예에게 수학 법칙과 공식을 알려주지 않고 오로지 질문만을 통해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노예는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 답을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노력을 통해서 답을 찾는다. 모르는 것은 발견할 수도 없고 탐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모르는 것은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더 나아지는 것이다.

 


3. 지식과 바른 의견의 차이는 신의 섭리?

여기에서 소크라테스가 상기설을 언급한 것은 미덕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미덕은 지식일까? 미덕이 지식이라면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있는 것인데 미덕은 배울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 시대에서 최고로 칭송받던 사람들-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을 살펴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들은 그들과 같은 훌륭함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부러 그의 자식들에게 미덕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미덕을 배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이르게 된다.

이런 결론에 의아해 하면서 메논은 미덕이 배울 수 없는 것이라면 훌륭한 사람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훌륭해지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미덕은 지혜만이 아니라 바른 의견으로도 가능함을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비록 지혜롭지는 못해도 바른 의견(판단, 신념)이 있다면 지혜로운 사람 못지않게 훌륭하게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 전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식이 바른 의견보다 훨씬 더 존중받는 것일까? 그 둘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른 의견들은 누가 원인을 추론하여 묶어둘 때까지는 큰 가치가 없는 것인데, 이렇게 어디로도 도망 갈 수 없도록 묶는 것은 스스로의 영혼에 있는 기억을 상기함으로써 가능하고 이를 통해서 바른 의견, 판단,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미덕은 신의 섭리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미덕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주어지는지 묻기 전에 먼저 미덕 자체가 무엇인지 탐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에 관해 확실히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미덕은 지식만을 통해서는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지식을 위해서, 그리고 신의 섭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인간 그 자신의 노력, 움직임이 필요하다.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포인트.

하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는 그것이 어떠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 다시 말해 어떤 것의 속성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내가 알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생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건들에서 많은 사람들은 문제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지 않는 것 같다.

, 노예와 소크라테스의 대화. 소크라테스 본인은 노예에게 가르친 것은 없고 다만 그의 영혼 속에 있던 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주장한다. 과연? 그이 질문은 사실 외견상 질문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 답을 포함하고 있고 노예에게서 긍정의 답만을 유도해 낸 것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앎이란 무엇일까?

노예소년은 그저 소크라테스가 만들어 놓은 밥을 받아먹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예소년에게 자신의 의견이 아닌 대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 있게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답했고, 이후에는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을 것. 노예소년에게 주어진 문제가 수학 문제라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수학적 논리라는 것은 그저 주어진 지식을 머릿속에 집에 넣는다고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논리가 자신에게 납득될 때 스스로의 힘을 통해서 이해가 될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진정한 앎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서 자신의 내적인 새로운 동력을 얻는 것이다. 앎은 결국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생활양식이 되어야 한다.

 

메논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소크라테스에게 앎이란 한 문장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문장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자로 규정된 것으로는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앎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를 할 때, <메논>에서 미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제한적인 한 문장으로 그것의 개념을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그렇게 정의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산파술적인 대화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 포인트에서 이야기 했듯이 그에게 삶은 하나의 개념을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정의 그 자체, 미덕 그 자체, 인간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항시 열려진 마음으로 그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함이란 바로 하나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이고 삶의 방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계와 이데아를 나눈 플라톤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다. 플라톤은 과두정이 무너지고 나서 기대를 걸고 있었던 민주정에 의해서 그의 스승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철저히 스승의 철학을 계승하고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삶으로 보여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하나의 완성된 체계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는 구술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사회의 마지막 주자인 소크라테스와 새로운 문자 사회를 열었던 플라톤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자라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지식을 전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도 사람의 말에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경청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문자를 없앨 수는 없다. 컴퓨터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도 없고, 스마트폰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세계에서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 다른 신체의 구조가 생성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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