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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읽기

프루스트가 보여준 세계

by 홍차영차 2023. 11. 24.

2023년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시읽기를 마무리 한 지 2주일이 지났습니다.

 

강의를 마치는 시간부터 '프루스트 읽기'를 마무리하는 글을 써야지 생각했는데 추워지는 날씨에 점점 더 게을러지네요. 정신 없이 지낸 여름을 보상하면서 겨울잠을 자야하는 건 아닌가 핑계를 대보면서 말입니다. 역시 강제적인 데드라인이 없으니 쉽지가 않네요. 강의에서는 자기 안에서 넘처 흐르는 무언가(something)를 써야 한다고 말했는데. ^^;; 다행히 마지막 시간에 읽었던 예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이야기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요.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이 삶은 어떤 점에서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매 순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삶을 밝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과거는 수많은 음화(陰畵)로 가득 채워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우리의 지성이 이런 음화를 ‘현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그리고 타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작가에게서 문체란 화가에게 색채와 마찬가지로 기법의 문제가 아닌 비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에서의 질적 차이의 드러남이며, 예술이 없다면 우리 각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그런 차이이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우리의 우주와는 다른 우주, 달에서 보는 풍경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낯선 우주에 대해 타자가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 우리만의 세계를 보는 대신 세계가 증식하는 걸 보며, 독창적인 예술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세계를, 각각의 세계가 무한 속에 굴러가는 것보다 더 상이한 세계를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세계는 몇 세기가 지난 후 렘브란트 또는 페르메이르라고 불리는 광원이 꺼진 후에도 여전히 그들이 특별한 빛을 보내온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13권 74쪽)

 

분명히 프루스트는 내게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를 보여줬습니다. "자신의 개성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만들어, 비록 현재의 삶이 사회적으로 또 어떤 점에서는 지적인 면에서조차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 삶을 거울에 반영"(3권 227쪽)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자의 '개성의 거울'을 투명하게 만들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거울을 통해서 비춰지는 세계가 많을 수록, 더 세밀할수록 내가 맞이하는 세계가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프루스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맛보는 시간이고, 또한 읽는 사람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자 수련처럼 느껴집니다. '의식의 흐름기법'이라는 프루스트의 글쓰기는 이런 자신의 개성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 속에나 나온 묘사일 뿐입니다.

홍차와 마들렌, 마르탱빌의 세 종탑, 게르망트 정원의 포석에서 마주치게 되는 '비자발적 기억' 역시 마찬가집니다. 분명 우리 각자는 마르셀이 그랬던 것처럼 동네 입구의 버드나무나 성당 혹은 여름철 모기향이나 오래된 책을 통해서 의식의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기억들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합니다. 조금은 메마르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물과 사람을 대하면서 자신에게 전해지는 그 순간적인 감각을 무시하지 않으면 됩니다. 잠시 그 순간에 머물러서 그 감각이 주는 세계를 바라보면 됩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의 첫권부터 그렇게나 여러번 신체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비자발적 기억'을 묘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각의 발견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첫번째 징검돌이 될테니까요.

 

그런데 프루스트는 신체적 감각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의식의 흐름과 비자발적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프루스트는 문학을 예술을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잃어버린>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일겁니다. <잃어버린>을 읽다보면 이 책이 음악 비평서적인가 아니면 미학 서적인가 혼동될 정도로 세부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양적으로도 꽤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셀의 이야기는 회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과 건축은 물론 전방위적으로 예술(론)을 펼쳐냅니다. 도대체 이런 예술 이야기가 왜 필요했을까?

 

끝으로 이 ‘시간’의 관념이 가진 마지막 가치는 삶의 자극제라는 점이었다. 이 관념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게르망트 쪽이나 빌파리지 부인과 함께 마차로 산책하던 중 이따금 섬광 같은 짧은 순간에 내가 느꼈던 것, 또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했던 것에 도달하고 싶다면 지금이 바로 시작해야 할 때라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삶이 밝혀질 수 있고, 우리가 끊임없이 왜곡하는 삶도 본래의 진정한 삶으로 되돌릴 수 있고, 그리하여 마침내 책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이 순간 삶은 얼마나 살만한 것으로 보였던가! 나는 생각했다. 그런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 것이며, 얼마나 힘든 작업이 그 앞에 놓일 것인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가장 숭고하고 가장 상이한 예술 분야에서 그 비유를 빌려 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인물에게서 가장 대립되는 면을 나타나게 하고 그 입체감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마치 공격전에서처럼 지속적으로 힘을 재결집하면서 책을 매우 면밀하게 준비해야 하고, 피로처럼 책을 견뎌야 하고, 규칙처럼 책을 받아들여야 하고, 성당처럼 책을 축조해야 하고, 우정처럼 책을 쟁취해야 하고, 어린아이처럼 책에 과도한 양분을 주어야 하고, 세계처럼 책을 창조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나 설명을 찾을 수 있는, 또 그 예감이 삶과 예술에서 우리를 깊이 감동시킬지도 모르는 신비로움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위대한 책에서는 건축가의 계획이 너무 방대한 탓에 스케치를 할 틈밖에 없어 결코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대성당들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가! (13권 305~306쪽)

 

프루스트의 글에서 '시간(temp)'에 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책 제목 자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고, 마지막 편의 제목 역시 '되찾은 시간' 인것만 봐도 그렇다. 특히 마지막 편인 '되찾은 시간'을 보면 <잃어버린>에 나온 많은 인물들이 늙어서 변한 모습이 나온다. 프루스트에게 시간은 당연히 시간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어떤 것도 아닌 듯 하다. 프루스트는 시간에 대해 말할 때마다 어떤 차이, 변화, 이행을 말한다. 샤를 뤼스의 변화된 모습과 행동, 질베르트와 질베르트 딸의 등장, 블로크의 변한 위상등만 봐도 그렇다. 시간(temp)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축적된 변화다. 특시 사람들은 각각의 시간을 똑같이 품고 있지 않는다. 각자 자신만이 경험한 세계가 자신의 신체 속에 자신의 독특성의 바탕으로 축적되어 있다. 각각의 사람들은 비물질적 시간을 축적하고 있는 아직 현상하지 않은 음화들이다. 바로 이렇게 각자가 자신만의 우연한 경로와 사건을 통해서 갖게 된 독특한 삶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프루스트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작업이다.

홍차와 마들렌, 포석을 통해서 찰나의 순간 자신의 감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비자발적 기억'은 순간적이고 다시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신체적 기억은 의도적인 배치를 통해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술이 필요하다. 수십억년의 시간을 통해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고 오로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축적된 독특한 삶을 물질화시키는 작업, 비물질적 시간의 물질화가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이 자로 '잃어버린 나'를 찾는 작업이고,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인것 같다.

 

그러므로 만일 내게 작품을 완성할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과 힘이 있다면, 비록 그 일이 인간을 괴물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라도 인간을 묘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터였다. 거기서 인간은 공간 속에 마련된 한정된 자리에 비해 반대로 지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세월 속에 침잠한 거인들처럼 그토록 멀리 떨어진 여러 다양한 시기를 살아 그 시기 사이로 많은 날들이 자리하러 오면서 삶의 여러 시기와 동시에 접촉하는 그런 무한으로 뻗어가는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시간’ 속에서. 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 쪽)

 

프루스트를 읽고 나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사키 아타루가 이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혁명적 행위이다. 프루스트가 보여준 세계를 봐버렸기 때문에, 읽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고를 당하지 않거나 감옥에 갇히지 않는 이상 프루스트를 읽을 수 없다는 흉흉한 소문에 무서워하지 말자. 아마도 이런 소문은 자신만이 프루스트가 보여준 세계를, 보물들을 갖고 싶다는 (대중들은 이해지 못한다는) (잘난 사람들의) 욕망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쳐들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시작하자. 잘 읽히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다시 또 읽어보자. 그러다 아주 조금이지만 프루스트가 보여준 세계의 일면을 본 사람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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