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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읽기

모두를 통과하며 빚어지는 나를 만나는 과정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글쓰기 후기

by 홍차영차 2023. 1. 19.

차곡차곡 정리된 '사랑'에 대한 멋진나무샘의 글을 읽으면서 이전에는 잘 보지 못했던 소년 - 청소년이라는 성장이 보였습니다. 지난 번에 썼던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에 대한 부분까지 읽고 보면, 프루스트의 책 자체가 점점 더 성장해가는 한 개인의 모습을 사랑론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지니지니샘의 사랑론을 읽으면서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정신/개인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체로부터 나오는 '개별화'를 지니지니샘이 콕 집어서 말한 이후로 이 개별화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생각해보니,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개별화'하는 작업을 통과해야 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유아기에 우리는 나와 주변을 개별화해서 볼 수 없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내 옆의 물건이 부서지거나 사람이 다치면 자신도 아파하고 힘들어하죠.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나와 세계를 다르게 보게 되는 정신의 복잡화를 겪는 것 같아요. 바로 이게 정신-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 자아라는 것은 결국 나와 세계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매개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전에는 나와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은 신화와 같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산타를 믿지 않는 순간은 바로 전체 속에 있던 내가 '개인'이 되는 순간,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마르셀이 앙드레가 아닌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 것 역시 자신과의 차이를 통해서, 그리고 소녀들의 무리 속에서 알베르틴을 개별화해내는 순간에 발생하는 것 같아요. 이 차이를 통해서 자신의 개별성을 더 확연하게 느낄 때,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지니지니샘의 말대로 "프루스트는 사랑을 통해 다른 것을 보고 느끼기를 원했"던 것 같네요. 우리는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

이번에는 특히 샘들이 인용하신 부분들이 아주 좋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 3, 4권의 핵심적인 부분들이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은유에 대한 부분도 이번에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스트 역시 언어, 즉 씌여진 글자에 대한 한계를 절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나무를 '산사나무'라고 명명되는 순간에 버려지고 삭제되는 무수한 잉여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래서 프루스트는 진부한 표현이나 직유를 싫어하고 혐오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처럼, ~같은이라는 직유는 '산사나무'에 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부한 표현들, 일차적인 비유들은 내가 '그' 산사나무, 지금 내가 지나치면서 바라보는 '그' 세 그루 나무를 만나면서 느끼는 것, 그 세 그루 나무들이 전하고자하는 비밀/힘의지에는 절대로 갈 수 없게 만듭니다. 진부한 표현과 직유는 내가 '나'가 되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해준 말, 사회의 평판들을 통한 것을 우리는 '나'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실 ~처럼,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나'의 유사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말들만 듣다보면, 나는 절대로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나'의 주변에 머물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이게 프루스트가 가진 힘인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는 일차원적 직유를 통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광대한 숲에서 지도 한 장 없는 사람에게, 풍경과 뉘앙스와 강도만 전달하면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도록 도와줍니다. 힘이 듭니다.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이전에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대지니까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스스로 이 길을 걸아갈 때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가장 세련된 환경에 살고 가장 재치 있는 화술과 가장 폭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그들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멈추고 자신의 개성을 투명하게 만들어

비록 현재의 삶이 사회적으로 또 어떤 점에서는 지적인 면에서보차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 삶을 거울에 반영하는 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1, 227쪽)

신짱샘이 인용하신 이 부분은 예술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처럼 들립니다. 예술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스스로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적 기준이나 평판과 다른 올록볼록하게 드러나는 나의 개성들을 바로보는 것이 힘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거울들로 자신을 드러낼 때, 그리고 이런 개성들에 비치는 세상을 바라볼 때, 나도 세계도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들어 또다른 특이한 거울을 생산한다는 것은, 세계를 넓히는 일이고, 또 세계를 더 풍부하게 감각하는 행위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를 비춰줄 다른 거울이란 결국 타자이고, 타자들이 만들어낸 거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 삶을 더 알록달록하게, 흥미롭게, 살만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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