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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관하여

계보학적 읽기

by 홍차영차 2021. 4. 6.

계보학적 읽기

: <선악의 조건> 5장 도덕의 박물학 192

 

 

 

 

우리의 감각도 새로운 것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가장 단순한’ 감각 과정에도, 나태라는 수동적인 정념까지 포함하여 두려움, 사랑, 증오 등과 같은 정념이 이미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음절은 고사하고) 한 페이지에 수록된 개개의 단어들을 다 읽지는 않는다. 이샙 개의 단어들에서 대략 다섯 개를 제멋대로 선택해서 이 다섯 개의 단어들에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 의미를 ‘추측하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192

 

 

이해되지 않는 책을 읽을 때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읽기가 어려워.” 혹은 “글자는 읽을 수 있겠는데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모르겠어.” 단어 자체는 읽을 수 있지만 그 의미를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읽기에 관해 니체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니체가 보기에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문장 속에 익숙한 단어들 몇개를 조합하여 그 의미를 “추측”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단어를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변에 있는 책 어디라도 펴서 읽어보자. 우리는 ‘계보학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기원’의 방식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읽는 행위에서 이전에 봤던 단어와 문장 구조가 먼저 눈에 띠고, 그것을 가지고 의미를 추측한다. 간단한 실험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어떤 새운로 것을 듣는다는 것은 귀에는 고스통럽고 성가신 일이다.” 첫번째 문장에서 우리는 금방 ‘아버지’와 ‘방’이라는 단어를 파악하고, 전체 문장을 추측해낸다. 또한 두번째 문장에서는 글자가 뒤바뀌어 있음에도 우리는 ‘새운로’를 ‘새로운’으로 ‘고스통스럽고’를 ‘고통스럽고’로 자연스럽게 읽어낸다. 즉 읽는다는 것은 실제 단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던 단어를 파악하고 그것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일 뿐이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보자. 문장에서 익숙한 단어들을 먼저 파악하는 것으로 읽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전에 이 단어들을 파악하면서 연쇄된 단어와 관념들도 읽기에 영향을 준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는 위계 -체벌-군대-전쟁-죽음과 같은 관념의 연쇄가 일어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버지-사랑-친구-따뜻함-위로와 같은 연쇄가 일어난다. 즉 하나의 단어, 문장,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이전의 경험들을 모두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읽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을 읽을 때도 기원적으로가 아니라 계보학적으로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데 아무런 어려움(고통) 없이 읽혀지는 책을 읽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냥 읽히는 책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과 사유, 세계관, 신체에 아무런 자극/변이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체를 바꾸고, 텍스트와 몸을 섞는 읽기를 해야 한다.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이 일어나야 한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작용이 아니다. 읽으면서 일어나는 관념의 연쇄를 끊어야 하고, 그러려면 이전의 의지와 다른 의지를 출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텍스트에 있는 그대로의 글자, 단어, 문장을 읽어야 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떠오르는 관념들의 연쇄를 중지하고 새로운 연쇄를 시도해야 한다. 어쩌면 읽기란 일종의 판단중지 행위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관념의 연쇄를 바꾸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연쇄를 일으키는 관념이란 몸에 새겨진 생각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생각을 통해서 연쇄를 바꾸는 것은 관념의 관념을 바꾸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이런 작업은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관념의 연쇄를 바꾸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새로운 관념의 형성, 감각을 통한 관념의 획득, 신체적인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는 일이다. 생각이 바꾸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반대로 몇 번의 신체 경험만으로도 신체성이 바뀌고, 덩달아 생각도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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